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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예 Nov 24. 2023

우울이 문손잡이를 잡을 때

산책하는 진저캣

참 이상하지. 나는 겨울에 태어났는데 겨울이 되면 우울증이 찾아온다.


나에겐 두 오빠가 있는데 큰 오빠의 태몽은 대단했다. 눈부시게 빛나는 큰 태양이 떠오르고 엄마가 그 태양을 치마폭에 받았다고 한다. 엄마는 종종 그 얘기를 하며 큰 오빠를 떠받들었다. 그 사랑을 먹고 자란 오빠는 우수한 성적과 침착한 태도와 좋은 직장으로 엄마의 자랑이 되었다. 옛날 사람들의 관습대로 사랑이 장자에게 몰린 탓인지 작은 오빠는 학교 성적도, 성격도 객관적으로 한참 부족했다. 그래도 큰 눈과 짙은 눈썹으로 큰오빠보다는 잘 생겼다는 칭찬을 듣고 자랐다.

아들이 둘이나 있어서 굳이 딸이 필요 없었는데 내가 태어났다. 피임의 개념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낳은 것 같았다.

큰오빠의 으리으리한 태몽 자랑을 듣고 자란 나는 엄마에게 내 태몽이 뭐였냐고 집요하게 물었다. 대충 좋은 것으로 만들어서 거짓말로 얘기해 줬다면 콩알처럼 남아있던 내 자존감이 바사삭 깨지지는 않았을 텐데.

“너를 얼마나 낳기 싫었는지 뱃속에서 아기인 너를 쑥 꺼내어 도마 위에 놓고 숭숭 썰었지. 이렇게 이렇게 말이야. 내가 생각해도 어찌나 끔찍하던지. 근데 그 꿈을 여러 번 꿨어. “

그때 내 나이가 이십 대였다.

자라오면서 엄마가 폭력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무렇지 않게 떠벌리는 그 얼굴과 입이 그렇게 잔인하고 난폭해 보일 수가 없었다.

‘난 사랑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탄생의 축복조차 받지 못했구나.’

엄마의 태연한 얼굴이 내뱉는 말에 기가 막혀서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이 집을 떠나거나 서른 살이 되기 전에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지적 호기심이 넘쳐서 여태까지 죽지 못하고 살아왔다.

삶이 힘들 때면 그때 죽지 못한 것을 후회하게 된다.


요즘 들어 ‘일찍 생을 마감했다면 외로움도 고단함도 더 이상 겪지 않고 좋았을 텐데...’라고 생각하는 걸 보니 우울증이 시작되려나 보다.

나는 겨울에 태어났는데 겨울만 되면 우울해진다. 탄생을 축복받지 못해서일까. 어떤 목소리가 내 귀에 속삭이는 것 같다.


너는 계속, 지독하게 외로울 거고

부정적인 감정과 무거운 책임감이

계속 너를 찾아갈 거야.

그럼 너는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아슬아슬한 중심을 놓치지 않기 위해

늘 그랬듯

위태롭게 서서 두 팔을 휘적이겠지.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햇빛, 운동, 카베르네 쇼비뇽,

그리고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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