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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예 Sep 14. 2021

작업실과 첫사랑

진저캣의 일기

내 작업실은 오피스텔 복도 끝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 열 시쯤 퇴근을 하면 등 뒤로 띠리링 도어록이 잠기면서 또각또각 터벅터벅 내 발걸음 소리만 긴 복도에 울린다.

엘리베이터 안 거울 속의 아줌마에게 '늙었구나. 참 열심히 사는구나.' 말하다 보면 금세 "1층입니다."라는 소리가 들린다. 거기서부터 짧은 횡단보도가 나올 때까지 바닥을 잘 보고 걸어야 한다. 오피스텔 주변의 예쁜 조경을 화장실로 쓰는 애견인들의 흔적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엔 여러 종류의 이기심들이 있는데 내가 매일 마주하는 이기심의 주인공은 양심 없는 애견인들이다.

그래도 짧은 횡단보도 앞에 서면 건너편 편의점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여름에는 가벼운 수다와 음주를 즐기는 사람들의 쾌활함이 있었다. 요즘엔 가을밤의 늦은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의 오고 감이 있다. '아, 나도 자전거를 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매번 그런 생각을 하며 짧은 횡단보도를 건너면 본격적으로 흡연을 즐기는 사람들의 구역이 나온다. 그럼 시들었지만 힘차게 사는 가로수 앞까지 숨을 참고 빠르게 걸어야 한다. 그 가로수 앞에는 신호가 긴 횡단보도가 있다. 나는 초록불의 숫자가 10이어도 다음 신호를 기다리는 편이다. 그러다 보면 입안의 혓바늘을 느끼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게 된다.


야자를 마치고 버스에서 내리면 길 건너편에 그 애가 보였다. 횡단보도 건너편 좁은 상가 입구에서 남들보다 머리 세 개는 더 큰 키를 꾸낏꾸낏 접어 감추고 있었다. 숨어있다가 나를 깜작 놀라게 해줄 생각이었겠지만 나를 발견하고 후다닥 숨을 때부터 큰 키가 눈에 띄었다. 그때는 나를 기다리던 그 애가 좀 귀찮고 한심해 보일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때를 소환하고 싶다. 내 얘기에 열심히 귀를 기울여주고 질문을 주고받던 그 티키타카가 그립다.

그 애는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다. 오래전에, 그 애가 갓난아이를 소중히 품에 안고 아내의 뒤를 따라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때 나도 모르게 아파트의 나무 아래로 후다닥 숨은 기억이 있다.  나는 그 애처럼 들키진 않았지만 나만의 흑역사로 남겨져 있다.  나도 두 아이와 고양이 한 마리의 엄마가 되었다. 우리가 만나서 대화를 한다면 육아와 영화와 책 얘기와 어릴 때의 생각과 다른 현실에 대해서 얘기하느라 밤을 새울 것 같은데 그건 반짝이는 별처럼 예쁘지만 가질 수 없는 순간이다.

나는 여전히 사람들과 거리를 관찰하며 든 생각들, 책을 읽으며 느낀 감정들이 머리를 떠다니는데 마땅히 얘기 나눌 사람이 없다. 그런 생각들을 친구들에게 흘리면 "먹고살만하니까 그런 낭만적인 생각도 하는구나. "라는 대답이 돌아올 거란 생각에 그냥 삼키게 된다. 가까운 지인들도 있지만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부연 설명해야 하는 느낌을 받으면 그 순간, 말문이 막히고 횡설수설하게 된다. 가끔씩 아이들과 산책을 하면 폭풍 수다를 떨게 된다. 하지만 그 시간도 점점 짧아지고 있다. 지금 아이들은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날아갈 준비를 하며 푸드덕 거리는 중이기 때문이다.

나는 쓸쓸하게 홀로 서 있는 가로수 앞의 긴 신호등을 기다릴 때마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럼 내가 할머니가 되어도 계속 반짝일 별이 떠 있다.


너는 지금도 그 별 사이를 날고 있겠지. 안녕, 너의 썸머여서 행복했어.



*영화 500일의 썸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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