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린 소설집 ‘오늘밤은 사라지지 말아요’
한동안 ‘그 해 우리는’에 빠져 살았다. 5년을 만나고 헤어진 두 남녀가, 수년 후 다시 만나 ‘그 해’ ‘그 마음’을 소환하는 이야기. 보는 내내 설레고 애틋하고 아프고 또 예뻤다. 누군가는 ‘없는’ 사랑의 기억조차 생겨난다고 했는데, 로맨스물에 이보다 더 큰 칭찬이 있을까. 드라마는 끝나고, 자꾸 한 장면이 찾아온다. 잠든 웅(최우식)의 찌푸린 미간에 연수(김다미)가 살포시 손을 갖다 대는 순간..
아, 연애는 이런 거지. 나만 아는 얼굴이 있는 것, 스르륵 펴지는 주름에 슬며시 웃음이 나는 것. 생각하며 나도 모르게 이마에 손을 얹어 본다.
이 장면을 전에도 본 것 같다. 데자뷔인가. 기억 회로를 돌리다 다다른 곳은 백수린 작가의 짧은 소설 ‘어떤 끝’이다. 소설집 ‘오늘 밤은 사라지지 말아요’(마음산책)에 실린 사랑 얘기로, 잠든 연인의 얼굴을 떠올리며 ‘나’는 이렇게 고백한다. “성훈은 자다가 가끔씩 인상을 썼는데 내가 미간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면 잠결에도 인상을 폈다. 그렇게 부드럽게 흐릿해지는 그의 얼굴 위의 주름들을 볼 때면 내 안에 차오르던 환희는 얼마나 깊고 놀라운 것이었는지.”
아, 사랑은 이런 거지. 상대방의 작은 몸짓을 아는 것. 그 사소함에도 부풀어 오르는 것. 습관처럼 웅의 미간을 만지던 연수의 마음이 이랬을까.
아주 특별한 사랑의 풍경 하나가 닮아있으나, ‘어떤 끝’은 ‘그 해 우리는’처럼 다정한 결말에 이르지는 않는다. 제목부터 ‘끝’나 있는 걸…. ‘나’와 ‘성훈’은 5주년 여행 중이지만, 이미 많은 게 무너져 있다. 연애 초에 함께 갔던 도쿄에서 추억에 기대어 관계를 회복하려 애쓰지만, 변한 게 거의 없는 도시에서 모든 게 변해버린 걸 깨닫는다.
아, 이별은 이런 거지. “여름날의 해바라기같이 활짝 만개했던 날들”이 “해가 저무는 창밖”이 되는 것. 연인의 잠든 얼굴을 더는 바라보지 않고, 보아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성훈’의 이마를 만지던 순간은, 이렇게 다 부서지고 마는 걸까. 불현듯 울적해져 말도 안 되는 뒷이야기를 내 멋대로 쓴다. 모를 일이라고. ‘어떤 끝’은 끝이 아닐 수도 있지. 이건 그냥 ‘나’와 ‘성훈’의 ‘그 해’일지도 모르지. 5년 뒤 다시 만나 다큐 같은 걸 찍고 있을 수도.
잠깐, 지금 저들 걱정을 할 때가 아니란 자각을 한다. 근시가 심해 안경을 쓰고도 나는 종종 미간을 찌푸린다. 그냥, 그렇다는 말이다. 그리고 당분간 드라마는 끊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