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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미 파커 Sep 12. 2022

가능할까, 세상에 나쁜 흔적을 남기지 않는 사랑이

김멜라 소설 '설탕, 더블 더블' 

“세상에 나쁜 흔적을 남기지 않는 사랑은 무엇일까.” 

김멜라 작가의 소설집 ‘제 꿈 꾸세요’에 수록된 단편 ‘설탕, 더블 더블’ 속 ‘나’는 묻는다. 

그것은 “친환경 무공해 사랑”이다. 그러니까 “아무런 오염 물질도 배출하지 않는 사랑”. 

가능할까. 모든 관계는 조금씩 나쁜 흔적을 남긴다. 

가까울수록, 사랑할수록, 흔적은 깊고 짙다.


그러나 ‘나’는 오래전 연락이 끊긴, 타인의 아내가 된 첫사랑 희래가 “도무지 가능할 것 같지 않은” 그런 사랑이라 믿는다. 그녀의 짝사랑 하소연을 들어주고, 상처를 보듬어 주던 20대의 어느 해부터, 8년이 지나 그녀의 남편인 듯한 한 미디어 아티스트의 SNS를 수시로 염탐하는 오늘까지. ‘나’는 희래의 일상을 상상하고, 행복을 빌다가, 그녀를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고 서울역사에서 열리는 남편의 전시회에 스태프로 참여하기에 이른다.


그 질척거림이 남 일 같지 않아 슬펐다가, 병적인 집착이 안타깝다가, 이런 순애보는 공포물이다 싶을 때 소설은 또 다른 ‘첫사랑’을 들려준다. ‘나’가 전시회장에서 만난 할머니의 사연. 7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린 소녀였던 할머니는 당시 서울역에서 식모로 일하다 일본인 역장과 사랑에 빠진다. 그는 할머니에게 “설탕을 따로 모아뒀으니 먼 데 가서 같이 살자” 한다. 설탕이 매우 귀했던 시대, 청혼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광복 후 그는 사라졌고 할머니는 오로지 설탕을 생각하며 버텼다. 서울역 어딘가에 분명히 숨겨져 있을 거라는 믿음. 이제 그것을 찾고 싶으니 ‘나’에게 설탕이 있는지 확인해 달라는 것이다. 벽을 뚫어서라도. 할머니의 달콤한 바람은 ‘나’에게 전이돼 희래를 향한다. SNS 사각 프레임 밖에 있는 희래를 보고 싶다. 둘만 아는 말을 댓글 창에 남겨 볼까. ‘나’는 휴대전화를 꺼낸다.

실재가 중요할까, 믿음이 중요할까. 

만일 설탕이 없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70년 전 그 말은, 할머니의 인생은, 그리고 ‘나’는, ‘나’를 추동해온 강렬한 그리움의 시간은….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산다고들 하는데 그것은 “나쁜 흔적 없는 사랑”만큼 텅 빈 말이 아닐까. 

특히 우리가 그 기억에서 자주 관대해지는 첫사랑. 그것은 상상하면 달지만, 이미 녹아 없어져 버린 설탕이 아닐까. 답을 찾는 이들에게 스릴러 드라마와 동화가 단단하게 묶인 이 소설을 추천한다. 귀띔하면, 할머니는 설탕이 “있을 거야”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벽 뒤에 있을 때만 달콤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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