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행복하게 해 주겠다!

다섯 살의 자존심

by 미미

아빠와 아들 둘의 놀이는 꽤 과격하다. 엄마가 해주지 않는 몸으로 부딪히는 전쟁놀이가 아빠와 자주 벌어지는데 그때마다 둘째가 아빠에게 외친다.


"행복해라! 당장 행복하지 않으면 공격하겠다!"


풉, 나는 둘째가 보지 못하게 돌아서서 웃는다. 행복하게 해 주겠다는 말은 요즘 둘째가 가장 많이 쓰는 표현 중 하나다. 집에서도 유치원에서도 알아주는 수다쟁이인 녀석은 쉼 없이 입으로 떠드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항복하라는 말을 행복하라고 잘못 사용하는 중이다. 행복하게 해 주겠다는 프러포즈 같은 고백이 이어지니 나와 남편은 그 진지한 얼굴과 상반된 말이 귀여운 나머지, 빵 터져서 웃느라 눈물이 나고 배가 아프다. 계속 들으려고 나도 남편도 아이의 잘못된 단어 선택을 고쳐주지 않는다. 오히려 남편은 아이에게 시비를 걸며 아빠를 묻는다.


"네가 아빠를 행복하게 해 줄 테냐!"

"그래, 이얍!"


둘째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결투신청에 답한다. 첫째가 아빠와 씨름하고 있는 틈에, 둘째는 방에 가더니 스펀지로 된 장난감 칼, 훌라후프에서 뺀 한 피스를 양손에 들고 어디서 찾았는지 모를 수영장용 챙모자를 쓰고 돌아왔다. 비장하게 기합을 넣고 아빠에게 덤볐다.


"이얍~!"


우리는 또 눈물 나게 웃고 말았다. 그러자 녀석은 딴엔 진지했는데 엄마 아빠가 깔깔거리며 웃자,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다. 갑자기 쓰고 있던 모자를 바닥에 집어던지며 엉엉 울기 시작했고, 두 팔로 힘껏 아빠를 밀쳤다.


순간 어릴 적이 떠올랐다. 어린 초등학생이라 영어는 아직 쥐뿔도 몰랐고, 천자문은 좀 배워서 한자는 알던 시절, 조깅(jogging)에서 조가 아침 조(朝)냐고 물었다가 엄마 아빠가 심하게 웃어서 민망했던 기억이 있다. 진짜 진지하게 궁금해서 물었던 건데, 부모님의 반응이 그렇게 민망하고 섭섭했더랬다. 그때 내 마음이 떠올라 웃음 뚝 하고 아이를 달래주었다.


"멋지게 변신해서 왔는데 엄마 아빠가 웃어서 마음이 상했어?"

"(끄덕끄덕)"

"엄마가 미안해. 이 모자를 어디서 찾았나 깜짝 놀라서 웃은 거지, 네가 멋지지 않아서 웃은 게 아니야.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어?"


최선을 다해 마음을 풀어주려고 핑계를 잔뜩 대보았다. 아직은 그런 핑계가 통하는 나이라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아이의 진지함에 내키는 대로 웃지 말아야겠다 다짐한다. 나름 자아가 강해진 걸 보면 부쩍 자랐구나. 전엔 아무리 대놓고 웃어도 눈치 못 채더니. 곧 여섯 살이 되는 우리 집 막냉이가 어느덧 웃음의 종류를 구분하는 능력을 탑재했다. 나중에 알게 될 거야. 이때 엄마 아빠의 웃음은 널 비웃는 게 아니라 귀여워서 어쩔 줄 모르는 웃음이라는 걸.


코로나 때문에 유치원 방학이 일찍 찾아왔다. 이른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아온 둘째가 오늘 산타할아버지가 유치원에 와서 선물을 줬다며 자랑한다. 잔뜩 긴장해서 찍힌 사진도 또 웃겼고, 산타 할아버지와 선생님의 카드를 자기 보물 서랍에 넣어둔 것도 귀여웠다. 그런데, 너무 커버린 우리 첫째가 산통을 깼다.


"야, 그건 1호차 기사님이야! 헤어스타일이 산타로 변장하기 쉬워서 1호차 기사님이 하신 거야."

"......?!"


이쯤 되면 1호차 기사님 헤어스타일이 궁금해지지만, 둘째는 멈칫하면서도 산타 선물을 풀기에 여념이 없다. 어쩌면, 산타든 1호차 기사님이든 선물을 줬으니 장땡일지도 모르겠다. 둘째 가르치기 좋아하는 첫째가 결국 남은 가르침을 토해내고 말았다.


"야, 행복이 아니라 항복이야."

".......?!"


쉿! 아직 알려주지 마... 항복은 행복이어야 하는데.


때마침 내 컨디션이 빨간불이라 연말연초에 펼쳐질 긴 가정보육을 앞두고 염려가 앞서지만 행복하라는 축복의 말에 위안 삼는다. 엄마는 너무 사랑해서 행복하라고 안 한다는데, 나도 행복하지 않으면 공격하겠다는 위협을 받고 싶다.


"여기 누우세요. 츅츅. 챡챡. 밴드 붙일게요. 3년 있다 오세요."

"네? 3년이요?"

"네."

"자, 3년 후에 왔어요. 마흔둘이 됐어요."

"츅츅. 샤샥. 밴드 다시 붙였고요. 3년 있다가 떼러 오세요."

"또요? 헐.. 선생님, 그럼 저 이제 45살인데요?"

"네. 밴드 다시 붙였습니다. 2년 있다가 알아서 떼세요."


8년의 치료 끝에 너와의 병원놀이 종료. 넌 진지하니까 엄만 웃음 참았다. 너의 사소한 말에도 이리 행복해지는 요즘을 나중에 꼭 떠올리고 싶다.


둘째의 내복 차림 변신템. 웃어서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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