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0대의 엄마는 가게 사장님이었다.
호탕하면서도 주변 사람들을 세심하게 챙겼던 엄마 주변에는 늘 사람들이 많았다.
마찬가지로 사람 대하기 좋아했던 엄마는 이른 오후부터 새벽까지 일하는 것에 정신적 스트레스를 크게 받지 않는 듯 보였다.
그랬다면 20년 동안 그렇게 즐겁게 보이며 가게를 운영할 수 없었을 테고 나중에도 그리워하지 않았을 테니깐.
훗날 엄마는 가게 사장님이었던 자신의 모습을 매우 그리워했고 그때처럼 에너지 낼 수 없음에 아쉬워했다.
엄마는 새벽까지 일하고 쪽잠을 잔 다음에 여러 가지 반찬을 만들어두거나 김치를 담갔다.
종종 바닥과 벽지를 비누칠해서 닦기도 했고 자식들 옷을 꺼내서 빳빳하게 다려놓았다.
지하상가나 도매시장 가기를 좋아했는데 무언가를 사지 않아도 활기찬 시장 분위기를 느낀다거나 구경하기를 좋아했다.
엄마는 형제들이나 조카들과 가깝게 살면서 엄마가 만든 반찬이나 김치를 가져다주며 왕래했다.
자식들이 생각하기에도 그러하고 엄마 스스로도 '엄마가 가장 안정되었고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말하는 시기였다.
사람일 이란 게 뜻대로 안 되기 마련이지만 이렇게까지 뜻대로 안 될 수 있을까 싶다.
엄마의 50대가 저물어감과 동시에 엄마는 원래 하던 가게를 접고 식당을 차렸다.
엄마의 조카와 동업하여 차린 식당이었는데 사람을 두고 식당을 운영하기에는 마진이 남지 않아서 온전히 엄마와 조카가 일했어야 했고 엄마의 조카는 생각보다 제대로 된 인간이 아니었다.
손님접대, 상 차리기, 설거지 모두 엄마가 도맡아 했고 조카는 주로 사람 없는 2층에서 낮잠을 자거나 노숙자나 양아치가 오면 식당을 지키는 어깨 정도의 일을 했다.
엄마가 식당을 하던 때는 식당에 자릿세를 받으려 하는 양아치들이 있었는데 싸움 잘하고 우락부락했던 조카는 그런 사람들을 상대하기에 딱이었다.
아니, 조카도 소싯적 그런 양아치였다는 걸 알고도 그런 사람과 동업을 시작한 엄마의 선택에 탄식이 나온다.
식당이 망하고 수중에 돈이 없으니 엄마의 형제와 조카들은 엄마에게 무례하게 행동했다.
아버지의 첩이 되었고 결국은 이렇게 망해버렸다는 조롱과 앞으로 뭘 해 먹고살 거냐며 걱정을 빙자한 빈정거림
식당이 망한 원인을 엄마에게 돌리는 조카들과 우리 가족 간의 싸움이 일어났다.
엄마의 언니이자 나의 이모라는 작자는 "몸이라도 굴려야 하는 것 아니야?" 하고 말하다가 엄마에게 뺨을 맞고 그대로 도망가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작은 언니는 이혼하고 혈혈단신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는 거의 2-3년 만에 생계와 가족을 잃었고 딸의 불행을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직관했어야 했으며 문제를 되돌리기 위해 나서면 나설수록 절대 뜻대로 되게 하지 않겠다는 운명에 장난질에 휘둘려야 했다.
그럴수록 엄마의 성격은 천천히 변해가고 있었다.
활발하고 사람 좋아하던 엄마는 매 사 부정적이고 사람들의 의중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능구렁이 같은 년
저저, 무슨 꿍꿍이 있는 거 아냐?
언제 죽을지 몰라도 잠자듯 빨리 죽고 싶다.
60대를 맞이하면서 그녀가 가장 많이 했던 말들이 아닐까 싶다.
원래도 감정기복이 심했던 엄마는 기복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굴곡 없이 늘 화 나 있었다.
아버지가 매 달 주는 생활비로 지내게 되었으니 아버지에게 깊이 감사하면서 이렇게 처참하게 고꾸라진 인생을 아버지 탓으로 여겼다.
아버지는 자신의 딸이 아니었던 언니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고 엄마는 언니의 이혼을 자신의 흠이라고 생각했기에 아버지에게 말하지 않았었다.
어쩌면 엄마와 가장 가까운 관계였던 아버지에게 엄마의 심정을 말할 수 없으니 벙어리 냉가슴은 날로 병들어갔다.
매 달 생활비를 주고 수척해지는 엄마에게 소소한 위로를 주는 아버지와 그의 딸이었던 나에게 점점 집착하기 시작한 엄마
그쯤, 나는 대학교 입시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보통의 경우와 다르게, 엄마는 나에게 지방대를 권유했다.
우리에게 연고가 없던 지방의 대학을 다니고, 그곳에 정착하게 되면 이혼한 언니의 아이도 데려오고, 우리는 전처럼 엄마를 중심으로 단단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10월, 수시로 지방대에 합격하니 엄마는 크게 기뻐했다.
도망치듯 서울을 떠나며, 서울을 떠나기만 하면 엄마를 괴롭히던 모든 관계와 상황에서도 해방될 거라 생각했고 실제로도 지방 소도시에 자리 잡으면서 엄마는 겉으로나마 안정되어 보였다.
엄마는 들뜬 마음으로 새벽같이 동서울 터미널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지방을 오고 가며 집을 알아보고, 훗날 아버지도 엄마와 함께 살지 않을까 하는 상상도 자주 했다.
엄마는 현모양처가 되는 것이 꿈이라 했는데 엄마의 상상대로만 된다면 엄마는 고난을 이기고 60살이 너머 드디어 꿈을 이루는 것이었다.
지방에 이사 오고 어느 정도 자리가 잡혔음에도 엄마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이 없으니 외로울 뿐이었다.
아버지는 나이가 먹어도 여성편력이 끊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근처에 엄마가 없으니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렸다는 소문이 띄엄띄엄 들렸다.
우리 집에 자주 왕래하며 생활비를 줬던 아버지는 몸 따라 마음도 멀어졌는지 생활비를 보내주는 날이 매번 들쑥날쑥하여 엄마의 애간장을 태웠다.
나는 취업 후 집을 떠나기 위해 학점 따기와 취업 준비에 매진했다.
좋은 학점을 받기 위해 늦은 저녁까지 도서관에서 지냈는데, 그건 집에 들어가기 싫었던 이유도 있다.
집에 들어가면 엄마의 외로움과 묵은 분노, 그럼에도 고개를 드는 희망들을 몸소 받아주어야 한다.
학교에 있으면 지독히 느껴지는 현실감이 집에만 들어가면 환상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 환상을 쫓아서 집으로 가지 않고 학교나 친구의 기숙사, 또는 서울에 있는 언니네 집을 전전했다.
아버지와 내가 없는 시간 동안 엄마는 늙어갔다.
물론 아버지도 나도 늙었지.
하지만 엄마는 육체와 함께 정신적인 에너지마저 늙어갔다.
매일 술잔을 기울이며 울었고 소리 질렀고 욕을 해댔다.
엄마가 잘할 수 있었던 일들을 오버하게 하여 사람들의 기를 죽였으며 과장하여 남을 비방했고 자식들 사이를 이간질했다.
스스로의 생각이 옳다는 엄마의 고집은 무서운 아집으로 변해갔다.
가장 가까이 엄마의 모습을 보고 지내던 나는 빠르게 병들어갔다.
우울감과 강박증이 깊어지고 흉통과 두통 같은 신체화증상이 심해져서 공황장애 증상으로 이어졌다.
엄마가 말하는 '개나 소나 걸리는 우울증'은 나를 빠르게 집어삼켰다.
나는 종종 산에 오르며 산 밑으로 떨어지는 모습이나 수풀 진 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죽어가는 상상을 했다.
마음이 답답한 날이며 스스로 머리를 쥐어뜯고 뺨을 때렸다.
심장이 터져버렸으면 좋겠으니 새벽에 힘껏 달리기도 했다.
반년동안 누구의 전화도 받지 않았고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
내가 가장 사랑했던 나의 엄마
나의 괴물이 되어버렸다.
가녀린 엄마. 내 전부였던 엄마.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고 싶었고 나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던 엄마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괴물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누가 그녀를 괴물로 변하게 한 것일까?
그녀 스스로인지, 그녀가 사랑한 사람들인지, 그녀가 희망했던 미래들인지 나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엄마 본인도 자식들도 이제 엄마를 막을 수 없었다.
엄마의 일 끓는 분노를 막을 수 없다.
나는 엄마에게서 도망치기로 결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