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함은 일생동안 기억된다.
누군가에 의해 기분 나빴던 일도 오랫동안 기억되지만 누군가에 의해 기분 좋았던 일도 오랫동안 기억에 남기 마련이다.
특히 나처럼 적응장애라 할 정도로 유아청소년기에 소속 기관이나 사회에 적응하기 어려웠던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들의 친절이 모이고 모여서 나의 인간됨, 이타심을 만들었다.
이것은 우울장애로 인해 삶의 끝에서 뒤 돌아봤을 때, 어둠을 밝혀줬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부모를 대신해서 초등학교 급식당번을 해주거나 영화관, 레스토랑, 놀이동산에 처음 데려다주었던 사람, 나의 큰언니였다.
나와는 근 20살의 나이차이가 나기 때문에 내가 아기였을 때 그녀는 이미 사회인이었다.
내가 어린 아기였을 때는 나를 돌보아준다거나 나를 위해 시간을 내는 일이 거의 없었고 오히려 나를 집이나 엄마에게 데려다주어야 할 때면 나가지 못하는 아쉬움에 꿀밤을 한 대씩 때리곤 했었는데 굵직하게 기억에 남는 어린 시절 '첫 경험'은 모두 큰언니와 함께였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학부모가 한 번씩 학교로 찾아와서 아이들 급식당번을 하며 자녀가 학교에 잘 적응하는지, 교우관계나 학업 수행 능력등을 상담했다.
나는 친구들의 엄마가 단정한 옷을 입고 학교로 찾아와서 국이나 반찬 따위를 퍼주고 자신의 자녀와 눈 맞춤을 하며 돌아가기 전에는 꼭 안아주는 과정을 보는 것 자체가 무척이나 스트레스였다.
우리 엄마는 새벽까지 일을 하니, 낮에 주무셔야 했으므로 엄마가 학교에 올 리는 만무하고.
굳이 학교에 부모를 불러서 나 같은 아이들의 열등감이나 은근한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날이 어처구니없었다. 8살 아이였지만 주변에서 들은풍월이 많았던 애어른이었기 때문에 이건 학부모가 안 계시거나 학부모가 오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무척이나 모욕적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베베 꼬인 꽈배기가 급식시간 직전에 나타난 큰언니의 모습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세상에, 언니를 보자마자 "큰언니!!!" 라며 환호성을 지르고 싶을 정도였다.
"얘들아, 우리 큰언니야! 우리 큰언니가 학교에 왔어!!!"라고 짝꿍을 붙잡고 소리를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애어른 체통에 그렇게 소리는 지르지 못하고 터질듯한 가슴만 부여잡았다.
언니가 반찬을 퍼주는 동안 그녀의 눈을 쳐다봤던가?
그날 언니의 등장으로 심장이 터질듯하게 기분 좋았던 기억 말고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급식을 다 먹고 운동장으로 나갔고 큰언니는 1학년 담임선생님과 짧은 이야기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언니는 친구들과 맛있는 거 사 먹으라며 천 원을 쥐어주고 교문 밖으로 나갔다.
사실 교실 안이고 교실 밖이고 언니와 사적인 이야기는 나누지 않았던 것 같고, 있더라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뜨겁도록 따사로운 햇빛 사이로 언니가 교정을 헤치며 나오던 모습과 꾸깃한 천 원짜리를 펴서 손에 올려주던 장면은 마치 한 폭의 수채화처럼 기억에 남는다.
오랫동안 고마웠고 지금도 고맙다.
나는 지금도 영화 보기를 매우 즐겨하는데 영화관에 처음 데려간 것도 큰언니였다.
지역에 있는 소극장에서 했던 만화영화였는데 나는 그 영화를 매우 보고 싶었기 때문에 상영 내내 옆에서 코를 골며 자던 큰언니가 전혀 거치적거리지 않았다.
만화영화 마지막 장면은 꽤나 감동적이었다.
죽은 줄 알았던 주인공이 다시 살아났고 세계는 평화를 되찾았기 때문이다.
많은 아이들이 울었고, 아이들 옆에서 부모는 휴지를 꺼내거나 소매 끝으로 아이들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아이들이 우는 모습을 보고 울고 있는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안심했다.
그때까지 코 골며 자고 있던 언니를 흔들어 깨웠다.
후로 오랫동안 극장에 데려다준 사람이 없었지만 그날의 기억은 머리가 아니라 마음에 남아서 나의 가장 즐거운 추억이 되었다. 영화관에 혼자 갈 수 있을 때부터 나는 꽤 자주 영화관에 갔는데 보고 싶은 영화가 있으면 새벽, 한밤을 가리지 않았고 상영하는 영화관이 없어서 서울에서 강원도까지 영화 한 편을 보러 간 적도 있었다.
참, 그때 그 시절 외식 레스토랑의 상징이었던 '아웃백'에 데려다준 것도 큰언니였다.
나는 아웃백에 간다는 사실에 전 날 저녁부터 굶으며 아웃백의 따뜻하고 활기찬 분위기가 음식을 기대했다.
언젠고 친구가 아웃백에서 가족들과 생일파티를 했고 스테이크를 먹었으며 아웃백에서 생일축하 노래를 불러주고 사진을 찍어줬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나도 그런 곳에 간다니 꽤나 기대됐다.
큰언니와 나, 큰언니 친구와 친구의 조카
네 명이서 아웃백에 방문한 것이었는데 따듯해 보이는 의자에 앉아서 캥거루가 그려진 벽을 구경하고, 식전에 나온 따듯한 부시맨빵 하나에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부시맨빵의 따듯했던 온기가 아직까지도 느껴지는 듯하다.
나에게 아웃백은 지금도 따듯한 곳이다.
정겨운 곳.
그런 따듯함을 선물해준 사람이 큰언니였다.
그래서 나는 이 사람을 미워할 수 없다.
나에게 소리치거나 모진 말을 할 때도, 나를 때렸을 때도 이 사람은 특별한 면책권을 가졌다.
어린 날의 따듯한 기억은 트라우마의 책임으로서도 면제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지녔다.
가족들과 왕래하지 않는 지금에도 나는 그녀의 호의에 감사하고 사랑한다.
"안녕? 내 이름은 미미야. 나랑 친하게 지내자"
라는 말을 어떻게 해야 될지 몰랐다고 한다면 이해하시려나.
유치원이 끝나면 늘 엄마 가게로 따라다니기 바빴던 나는 친구가 한 명도 없었다.
친구에게 다가가는 방법, 친구에게 인사하는 방법, 친구들말을 경청하고 상황에 맞는 대답을 하는 방법 등등 또래 친구들과 어울려 지내는 방법을 전혀 알지 못했고 그 상태로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고만고만한 동네 아이 들이었을 텐데도 온통 처음 보는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은 첫날부터 서로의 이름을 호명하며 친분을 다지거나 서로에게 호감을 보이며 다가갔다.
실내화가방을 휘두르며 장난치던 아이들도 있었고 구석에서 얌전히 상황을 지켜보는 아이들, 손을 잡고 화장실에 함께 다녀오는 아이들, 스티커를 나눠주는 아이들, 조잘조잘 떠는 아이들 사이에서 나는 혼자였다.
고백하자면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 몰랐을뿐더러 다가가서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친분을 쌓아야 하는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1학년 미미는 혼자였으나 혼자였음을 인지하지 못했다.
2학년에 올라가서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또래 친구의 이름을 불렀던 적이 있었던가?
또래 친구가 나의 이름을 불렀던 적이 있었는가?
지금 생각하면 혼자 학교 생활을 하는 상황이 스트레스로 다가오지 않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그걸 2년 동안 인지하지 못했다.
3학년이 되고 담임선생님이 부쩍 질문을 많이 하셨다.
부모님이 뭐 하시는지, 학원은 다니는지, 학교 끝나고 집에 가서 무얼 하는지..
그리고 활기차면서 남을 잘 도와줬던 여자아이에게 나를 소개해줬다.
(지금 생각하면 반장이었던 것 같다.)
쉬는 시간에 무리 지어 놀고 있는 여자아이들 사이에 나를 껴주어 함께 말하도록 도와주셨다.
담임선생님이 나에게 소홀해하지 않으니 아이들도 나를 무리에 끼워주었다.
나는 한 마디 한마디 말하기 시작했고 곧 수다쟁이가 되었다.
당시에 급식을 배급하고 남은 반찬은 급식 배급 도우미 이모님들이 가져가시거나 학교에서 처리했었는데 3학년 담임선생님은 남은 급식 반찬들을 나에게 싸주셨다.
비닐봉지를 두 겹으로 꼼꼼히 포장해서 가방에 넣어주셨다.
집에 가져가서 저녁에 밥이랑 먹어.
과자 같은 거 먹지 말고 밥이랑 반찬 꺼내서 먹어~
지긋하고 따듯했던 선생님의 얼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목소리도 5월의 햇살처럼 따듯했고 머릿속에 자리 잡은 선생님 모습도 무척 사랑스럽다.
저도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근데 못 될 것 같아요.
왜?
그냥 못 될 것 같아요.
미미도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는데 왜 그렇게 생각할까?
저는 아버지도 없고 집이 좀 이상한 것 같아요.
엄마아빠가 있든 없든 어떤 사람이든 너는 다른 사람으로 살 수 있어.
선생님 엄마아빠도 선생님이 아니야.
근데 자기가 꿈을 꾸고 노력하면 이룰 수 있어.
선생님이 해주셨던 말이다.
나는 이 말을 듣고 장래직업을 '회사원'으로 정했다.
우리 집에는 회사원이 한 명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회사원이 되고 싶었다.
낮에 자고 밤과 새벽에 일하는 엄마아버지와 다르게 낮에 일하고 밤에 잠들고 싶었고 매일 같이 술도 마시지 않고 월급을 받으면 저금을 하고 내가 노력하면 더 높은 곳으로 승진할 수 있는 회사원을 꿈꿨다.
엄마와 언니들은 배포도 작다 했다.
손이 작으니 꿈도 작다 했는데 나에게 '회사원'은 잡을 수 없는 밤하늘의 별처럼 아늑히 빛나는 장래직업이었다.
물장사, 밤장사를 못해서 돈을 적게 벌어도 괜찮아.
나는 평범해 보이는 다른 사람들처럼 살아보고 싶어.
그뿐이야.
평범하게 살 수 있다는 꿈을 심어준 사람, 3학년 담임선생님의 호의에 깊이 감사한다.
친척들이 내 앞에서 내 아버지를 욕할 때 조용히 나를 데리고 나가서 손잡고 함께 걸었던 작은 외삼촌, 너는 있는 그대로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말해줬던 단짝친구, 워낙 성실한 친구니깐 어딜 가서도 크게 성공할 거라고 추천서를 써준다고 했던 대학 교수님.
당장 숨 쉬는 일도 불안해서 벌벌 떨었던 나에게 그들의 따듯한 손길, 마음을 진정시켜주는 말 한마디는 '살아있음에 대한 증명'이자 '나도 할 수 있다'라는 희망이었다.
나 혼자서 파고 있던 구덩이가 사실은 나의 견고한 가정을 위해 준비하고 있던 집터라고 알아봐 준 반가운 느낌이랄까?
그들이 특별한 뜻을 가지고 나에게 했던 행동일 수 도 있고 그들이 워낙에 착한 사람들이라서 의례적으로 하는 호의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에겐 삶의 끝에서 기억했을 때도 행복했던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