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랑은 엄마의 빛이었네(완결)
붓을 들었다.
탁자 위에는 갖가지 채도의 노란색 물감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고,
그것들 중 하나를 고른 다음 색을 조율할 흰색 물감도 함께 올려두었다.
노란색이라는 단순한 이름 아래 이토록 방대한 스펙트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한다.
인체의 안구로 들어오는 시각적 신경들이 무척
정교하고 세밀하다는 사실이 신비롭기까지 했다.
물감 특유의 냄새가 뇌의 신경들을 기분 좋게 상기시켜 준다.
그런데 무언가가 자꾸 떠오를 듯 말 듯 맴돌며 배회하다가
다시 뒤로 밀려나기를 반복했다.
"뭐지? 뭐였을까?"
후각이 선사하는 청량함을 통증이 흡수하는 듯한 기분마저 들어,
나는 떠오르지 않는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
마음에 드는 노란색을 골라 파렛트 위에 쭉 짜냈다.
흰색을 조금씩 섞어 휘저으며 나만의 컬러를 만들어내던 순간,
아까 그 희미했던 기억이 살아났다.
그것은 아주 어린 시절, 부엌에서 엄마가 두르고 있던 앞치마였다.
엄마의 앞치마!
엄마가 하나밖에 없는 귀한 것이라며 늘 깨끗하게 사용하셨던
그 예쁜 앞치마에는 색색의 실로 수 놓인 야생화들이 피어 있었다.
나는 원래 그리려던 모호한 이미지를 지워내고,
어렴풋하지만 뚜렷한 피사체의 추억을 그리기로 했다.
실제 우리 집 외벽은 흰색이었지만, 캔버스 위에는
환하고 따스한 노란 담벼락을 벽돌 모양으로 세우기로 했다.
그 위에 엄마의 앞치마에서 본 야생화들을 그려 넣는다.
기억 속 앞치마에는 야생화들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던 것 같기도 했으나,
나는 듬성듬성 채우기로 했다.
너무 빼곡하면 추억의 기억과는 거리가 멀어질 것 같았고,
특히 아련한 느낌을 살리고 싶었다.
캔버스에 물감을 올려 덧칠하고 말리고, 다시 올려 덧칠하고 말리는 과정의 반복.
그렇게 야생화들을 한 땀 한 땀 마치 수를 놓듯 그려나갔다.
몇 시간이 흘렀을까.
물 한 잔을 마시려 허리를 펴는 순간, "악!" 하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고통 섞인 비명 소리가 조용히 낮잠을 자고 있던 고양이 '루시'를 놀라게 했다.
이내 루시는 '나 보란 듯이' 우아한 자태로 기지개를 펴고는
해가 드는 창가로 자리를 옮겨갔다.
그림에 몰입하는 동안 통증을 무시하고 있었나 보다.
나는 마그네슘 한 알을 입에 넣고 녹이며 잠깐 발코니로 나갔다.
'오늘 작업을 끝낼까, 아니면 내일 다시 작업할까.'
결국 3일 동안의 작업 끝에 그림이 완성되었다.
하지만 완성의 기쁨보다는 아쉬움이 앞섰다.
3일씩이나 매달린 결과물치고는 너무나 부족한 작품 같아서,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엄마는 야생화를 무척 좋아하셨다.
엄마는 야생화가 왜 좋은가. 물은 적이 있었다.
단단한 땅을 기어이 뚫고 나와 자신을 지키는 강한 것이라, 고 하셨다.
그중에서도 개나리와 코스모스를 무척 좋아하셨는데,
가끔은 가수 김상희 씨의 ‘코스모스’를 흥얼흥얼 부르기도 하셨다.
"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 있는 길..."
(그 멜로디를 떠올리니 다시 내 눈에 눈물이 맺힌다.)
1932년생.
전쟁과 광복, 그리고 굴곡진 가족사 속에서 평생을
험난한 여정으로 살아가신 나의 엄마.
아빠는 엄마가 오십도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고,
그토록 사랑하는 큰아들, 오빠마저 스물둘의 나이에 죽음을 맞이했다.
내가 국민학교 2학년 겨울방학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누군가 엄마의 생을 색으로 표현하라면 나는 아주 짙은 보라색이라 말하겠지만,
엄마는 늘 귀엽고 어여쁜 노란빛을 잃지 않으려 애쓰셨던 분이다.
남편 사랑받을 만하니 혼자가 되시고,
살기 위해 남의 집 살이와 봇짐장사를 마다하지 않으셨던 분.
손에 물 마를 날 없으면서도
자식 사랑만큼은 그득그득 넘치게 퍼부어 주셨던 그 고단한 삶.
문득 깨닫는다.
그날 새벽의 극심한 통증은 사실
언제나 나를 바라보며 지켜주는 엄마의 노란빛이 아니었을까.
나는 평생 엄마가 나의 수호신이었다고 느끼며 살아왔다.
아픈 내 새끼의 고통을 그 빛으로 치유해주고 싶어 찾아오신 것은 아니었을까.
이제는 엄마에게
맛있는 것을 사드리고, 좋은 곳에 모시고 가고,
고운 옷을 입혀드릴 돈도 있고 엄마가 원하시는 건
그 어떤 것도 다 드릴 수 있는데, 엄마는 무엇이 그리 급해 서둘러 떠나셨을까.
아리다. 아리고 아려 저며져 오는 동통.
"돈 많이 벌면 아끼지 말고 맛있는 거 먹고 좋은 데 여행 다녀.
낡은 옷 말고 꼭 예쁜 옷만 입고 다녀. 넌 그래야 돼."
그것이 엄마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갓 마흔에 낳은 늦둥이 딸을 국민학교 2학년 때까지 업어 키우셨던 분.
나는 사춘기가 가까워질 때까지도 엄마 젖을 조물거려야 잠이 들곤 했다.
기억이 생생해질수록 숨이 가빠온다.
과거의 통증이 무의식의 틈을 타고 현재의 몸으로 전이되는 증상인가 보다.
병원 침상에 누워 계시던 어느 날, 내 친구의 병문안 후,
엄마는 조용히 후회 섞인 말씀을 하셨다.
"내가 너를 미술을 시켜줬어야 했는데... 네 친구 ○○을 보니
미술을 해도 이 시대에서는 먹고살 수 있더구나. 미안해, 막내."
나는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고, 눈물 섞인 미소를 지어 보였었다.
그런 말 하지 말라고. 난 이제 그림 안 그려도 된다고.
엄마만 어서 나아주길 바랐다.
***
엄마 내가 그린 그림이야. 보여 드리고 싶다...
그리움.
어쩌면 내가 앓고 있는 이 만성적인 통증은 떠나간
가족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이 마음에 병이 되어 몸으로 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립다는 것은 너무나 뜨거우면서도 동시에 차갑다.
발은 새파란 얼음장같이 시리지만
가슴은 불덩이가 되어 들끓는 활화산 같은 모순적인 감정.
그날의 통증은,
무슨 수를 써도 닿을 수 없는 그 무수한 시간들을 내 안으로
들여놓아 생긴 통증이었나 보다.
꽁꽁 얼려둔 채 누구에게도 내보이지 않았던 나의 냉랭한 한(恨)을
따스하게 녹여주기 위해,
엄마는 노란색이라는 빛의 형태로 내 새벽에 찾아오신 것이리라.
그리움. 사랑.
그리움이 사무치고 사랑한다고 크게 외치고 싶다.
나는 곁을 떠난 이들을 여전히 깊이 사랑하고 있다.
(가끔 ‘루시’를 대하는 나의 애정이 지나치다 싶을 때면, ‘혹시 엄마일까?’)
하는 허무맹랑한 생각을 하기도 한다.
이별이 이토록 어려운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