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번째 자작시 - 2월 14일

성 발렌티누스 VS 안중근 의사

by 서쪽 숲나라


다이어리데이, 밸런타인데이, 화이트데이, 블랙데이, 로즈데이, 키스데이, 실버데이, 그린데이, 포토데이, 와인데이, 무비데이, 허그데이...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왠지 숨찬다. 놀랍게도 인터넷에 치면 버젓이 나오는, 매달 14일에 이름붙여진 국적불명의 기념일들이다. 이런 해괴한 퍼레이드의 원인은 아마도 2월 14일 밸런타인 데이인듯 하다.


모두가 알다시피 밸런타인 데이는 고대 로마제국의 사제 성 발렌티누스에서 유래됐다. 당시 로마 황제였던 클라우디우스 2세는 젊은 남자들의 병역기피 행태를 우려해서 금혼령을 내렸다. 이에 반대했던 사제 발렌티누스가 사랑하는 남녀를 결혼시켜 주었고, 이 사실을 안 황제는 발렌티누스를 처형해버렸다. 그 날이 2월 14일로 영미권에서는 발렌티누스의 축일로 지정하여 그를 공경하였다.


원래 밸런타인 데이는 연인들이 선물을 주고받는 날이었는데, 옆나라 일본의 한 제과업체가 쵸콜렛을 팔아먹을 목적으로 이를 멋대로 차용해서 캠페인을 벌인 후 '여자가 남자에게 쵸콜렛을 주는 날'로 정착됐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의 식민지였던 대한민국은 그걸 고대로 따라하면서 2월 14일이 매우 중요한 기념일로 부상하게 된 것. (그 후 14일의 강박에 걸린 누군가가 만든 화이트 데이, 블랙 데이를 시작으로 매 달마다 억지 기념일을 만들게 된 것은 아닐까.)


여튼 졸업식에 버금가는 2월의 큰 이벤트로 자리잡은 밸런타인 데이에 대한 불만의 소리가 최근 커지고 있다. '남의 나라 기념일 챙기지 말고 우리나라 역사나 제대로 알아라. 그날은 안중근 의사의 사형 선고일이다.'라는 주장을 누가 먼저 펼쳤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는 밸런타인 데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솔로들에게 아주 그럴듯한 슬로건이 됐다. 안중근 의사에 1도 관심없던 솔로들이 갑자기 독립투사가 되어 분연히 외친다. 안중근 의사 사형 선고일을 기억하자고.


글쎄다. 안중근 의사 사형일이면 몰라도 선고일이라니. 가도 너무 갔다는 생각이 드는 건 나뿐일까. 굳이 안중근 의사까지 소환하면서 밸런타인 데이 본래의 의미를 퇴색시키려 해도 솔로들의 외로움을 달래기엔 역부족이라는 생각에 쓴웃음만 나온다. (물론 안중근 의사는 민족의 영웅이 맞지만.) 그 심정을 2월 14일의 새벽, 이 짧은 시에 담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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