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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모사 Nov 17. 2019

어떤 위로

  도넛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훅 끼쳐오는 빵 냄새에 은정은 비로소 온 몸의 긴장이 풀렸다. 방금 열두 번째 면접을 본 회사 건물 1층에 자리하고 있던 그 가게는 오전에 면접 보러 건물 안으로 들어갈 때만 해도 있는지도 몰랐다. 3시간의 기다림과 10분의 면접 끝에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한 시간 거리의 집까지 바로 돌아갈 힘이 없던 은정의 시선을 잡아끈 것은 그 도넛 가게 유리창에 큼직하게 붙어있던 문구였다. 


‘당신의 위로가 되어드릴게요’


  나요, 나. 지금 나한테 그거 필요해요. 위로. 속으로 중얼거리며 낯선 곳의 낯선 가게 안을 들어서게 된 것이다. 은정보다 대여섯 살은 어려보이는 포니테일 머리의 귀여운 여자 점원이 생글거리며 묻는다. 어떤 걸로 주문하시겠어요? 은정이 잠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대학교 2학년쯤 되었을라나. 쟤도 한창 취업준비 중이겠지? 열심히 사네. 난 저 나이때 뭐했지? 뭐했긴, 나도 알바하면서 스펙 쌓느라 뺑이쳤지. 그래. 나도 남들만큼 열심히 했다고. 


  “저, 손님?”

  의아한 눈빛을 던지는 포니테일의 말에 은정은 정신을 차렸다.

  “여기서 제일 달달한 도넛이 뭐예요? 그거 두 개랑 따뜻한 아메리카노 주세요.”

  문제는 그거야. 주문을 마치고 푹신해보이는 붉은 쇼파쪽으로 걸어가면서 은정은 생각을 이어갔다. 남들만큼 해서는 택도 없었다는거. 남들보다 더 잘했어야 한다는거. 이력서를 수없이 쓰고 면접에 연달아 떨어지면서 은정은 비로소, 선배 언니들이 남자들 군 가산점에 도끼눈을 뜨고 반대한 심정을 알 것 같았다. 1점, 아니 0.1점 차이로 당락이 좌우되는 엿같은 취업시장은 취준생들의 마음을 점점 팍팍하게 만들었다.



  자리에 앉아 꽉 끼는 검은 투피스 정장의 상의 단추를 풀고 5cm 굽의 검은 펌프스 힐을 잠시 벗어놓았다. 1년 반 전, 정말 큰 맘 먹고 백화점에서 3개월 무이자 할부로 구매한 정장과 구두는 열 두 번의 면접을 거치는 동안 주인과 함께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구두 굽은 아홉 번째 면접을 보기 전에 갈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벌써 많이 망가졌다. 


  그때 포니테일의 경쾌한 목소리가 들렸다. 주문하신 도넛과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노래하듯이 청량한 음색에 은정은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음식들이 담긴 쟁반을 들고 자리로 돌아온 은정은 큼직한 하트모양의 도넛을 한 입 베어물고 오물거리다가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들이켰다.



  “와, 대박.”

  자기도 모르게 은정은 육성으로 감탄했다. 설탕이 90% 이상일 듯한 궁극의 달달함을 뽐내는 도넛과 쓰디쓴 아메리카노는 정말이지 이 시대 최고의 소울메이트야. 방금 열 두 번째 면접장소에서 자신에게는 눈길도 안 주고 옆자리 스카이출신 여자애에게만 질문을 건네던 면접관도 지금 이 순간에는 용서가 될 것만 같았다. 쇼윈도의 문구대로 은정은 위로받고 있었다.


  “손님, 맛은 괜찮으세요?”

  근처 테이블을 정리하고 있던 포니테일이 웃는 낯으로 은정에게 말을 붙였다. 얘 뭐야, 귀여운 애가 상냥하기까지 하네. 마주 웃어주며 맛있어요, 감사합니다, 라고 은정은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갑작스레 두 눈이 뜨거워지더니 후두둑 눈물이 떨어졌다. 나 왜이래, 미쳤나봐, 왜 이런 데서 울고 난리야, 난생 처음 겪는 당황스러운 상황에 은정은 어쩔 줄을 몰랐다.


  포니테일은 더 당황해하며 냅킨을 뭉텅 뽑아서 은정에게 건네주었다. 은정은 그만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매장 내에 있던 몇몇 손님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포니테일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울고 있는 은정의 등에 살며시 손을 대고 쓸었다. 산더미같이 쌓였던 냅킨들을 다 쓸 때까지 그녀는 은정의 옆에 가만히 있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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