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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모사 Nov 17. 2019

벚꽃 비기닝

  수진은 말없이 창밖을 응시했다. 8층 높이의 스카이라운지에서 바라보는 도시의 야경은 익숙한 듯 생경했다. 대로변에 줄지어 서있는 벚나무들은 솜사탕을 조로록 늘어세워놓은 것 같았다.


  “수진씨. 무슨 생각 해요?”


  눈 앞의 은호가 묻는다. 이 남자의 목소리는 특별하다. 깊은 울림이 있는 저음. 묘하게 사람을 안심시켜주는 목소리다. 하지만 세 번째 보는 이 남자도 아직 수진에게는 낯설다.


  첫사랑이던 남자는 대학교 1학년 때 만났다. 동아리 선배였던 그와 육년의 연애를 하고 세상 무너질 듯한 이별을 한 게 일 년 하고도 3개월 전이다. 간신히 들어간 회사를 밥 먹듯이 결근하고 급기야 시말서까지 썼다. 


  점점 몸과 마음이 망가져가는 수진을 보다 못한 주위 친구들은 사랑은 사랑으로 잊어야 한다며 많은 소개팅을 주선했다. 하지만 육 년간이나 마음을 줬던 남자를 쉽게 털어버리기에 수진은 너무 외골수였다. 그렇게 터닝포인트가 될 수도 있었던 수많은 만남들이 무산되었다.



  텅 빈 눈을 하고 살아가던 수진에게 직장 동료인 진영이 조심스레 자신의 사촌오빠 은호의 얘기를 꺼낸 게 한 달 전이다. 사람이 되게 진중하고 따뜻해. 이제 일 년도 넘었는데 수진이 너, 다른 사람 좀 만나봐야 하지 않겠어?


  수진이 이제껏 그래왔듯이 마다하지 않았던 이유는 아마도 4월의 벚꽃 때문이었을 거다. 회사 주위를 빙 둘러싸고 있는 왕벚나무의 색이 너무나도 고와서, 흩날리는 꽃잎들이 아리도록 아름다워서였을 것이다. 눈부신 봄이었고, 세상 모든 것들은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유죄!’ 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렇다고 수진이 새로운 소개팅에 특별한 기대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실연의 상처는 아직까지도 완전히 아물지 않았고 수진은 그것을 완전히 치유하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저 벚나무를 함께 즐길 수 있는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은호는 진영의 말대로 배려심이 깊고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남자였다. 억지로 수진에게 이야기를 꺼내도록 재촉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자신이 침묵의 틈을 메우기 위해 억지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워섬기지도 않았다. 그냥 수진과 같은 시간을, 같은 공간을 함께했다.


  첫 번째엔 커피를 마셨고, 두 번째 데이트땐 영화를 봤다. 그리고 오늘, 은호의 안내로 도심의 스카이라운지에서 세 번째 만남을 가지는 중이었다. 은호는 화려한 빛깔의 데낄라 선라이즈를, 수진은 달콤한 깔루아 밀크를 주문했다. 음료수같기만 했던 첫맛과 달리 잔이 비워질수록 칵테일 내면의 알콜이 점점 자기주장을 하고 있었다. 둘 다 술을 못해서 금세 얼굴에 붉은 기가 돌았다. 



  수진은 은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 남자, 아직 낯설지만 모든 게 뭉근하게 편안해지는 이 남자랑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온기 머금은 미소를 짓고 있는 은호에게 하마터면, 은호씨 생각중이예요, 라고 말할 뻔했다. 


  칵테일 한 잔씩 음미하고 나온 도심의 밤거리는 봄바람에 흩날리는 벚꽃과 가로등, 그리고 술기운이 어우러져 몽환적인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래서 수진은 별안간 자신이 은호의 품에 안겼을 때, 아 내가 많이 취했나보다 하고, 은호에게 죄송합니다 속삭이고 몸을 가누려 했다. 그러나 이번엔 분명하게 느껴지는 은호의 억센 팔 힘이 그녀를 강하게 끌어당겼고 다시금 수진은 은호에게 안겼다. 빠르게 뜀박질하는 심장 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오르내렸다. 그리고 꽃비 속에서, 은호의 품속에서 수진은 조용히 확신했다. 


새 봄과 함께 새로운 사랑이 시작되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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