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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모사 Jan 16. 2019

"저 아줌마 아닌데요."

   혜린은 버스를 타고 가는 길이었다. 목적지는 친한 친구를 만나기로 한 커피숍. 어제 구매한 새 모직 원피스를 입고, 황홀하게 반짝이는 네일아트로 꾸민 손 끝에는 아끼는 토트백이 매달려 있었다. 차창 밖으로 스쳐가는 풍경과 적당하게 화사한 날씨, 풍선처럼 두둥실 날아오르는 그녀의 기분까지 모든 게 잘 그려진 한 폭의 캔버스 같았다. 완벽한 하루를 예감하며 혜린은 미소지었다. 그런데.


  "아줌마."


  갑자기 옆자리에서 들려온 한 마디에 두둥실 풍선이 뻥-! 캔버스가 북-! 모든 게 망가져버렸다. 고개를 돌리니 80은 되보이는 할머니가 주름살 자글한 얼굴로 웃으며 말을 건다.


  "아유, 손톱이 너무 예쁘네."


  그것은 낯선 사람과 나눌 수 있는 훌륭하고도 마음에 드는 대화 소재였다. 그녀가 공들여 손질한 손톱에 대해서 알아봐주고 칭찬해 주심에 감사를 드리고 훈훈하게 이야기를 이어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줌마'라는 소리만 아니었다면. 하지만 혜린의 기분은 이미 그로 인해 돌이킬 수 없게 구깃해졌고 그 할머니가 그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양을 했다 하더라도 더 이상 귀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것은 아줌마란 단어 하나로 인해 이미 결정나버렸다.


  "저 아줌마 아닌데요."


  낮게 말하는 혜린의 목소리에서 한기가 느껴졌다. 뭐라고? 하며 검버섯 가득한 볼을 내 쪽으로 들이대는 그 할머니께 혜린은 다시 힘주어 한 마디 한 마디 말했다.


  "저 아줌마 아니라고요. 아무한테나 아줌마라고 하시면 안돼죠."


  주름진 얼굴에 무안함이 번진다.


  "아이고, 아가씨여? 난 또 아줌만줄 알고..."


  솟구치는 짜증에 혜린은 아예 고개를 옆으로 돌려버렸다. 다시 창 밖 풍경에 집중해보려 했지만 그게 될 리가. 아줌마란 단어가 주는 분노의 파급은 강력했다. 한 5분간을 곱씹던 그녀는 옆자리 할머니께 다시 화살을 돌렸다. 아무 생각없이 천진하게만 앉아있는 그 모양새가, 방금 당신이 낯선 여자에게 얼마나 큰 불쾌감을 선사했는지 상상도 못 할 흰 서리 내린 작은 머리가 못마땅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줌마란 말 함부로 하시면 욕 먹어요. 실례라구요. 실례."


  또박또박 내뱉는 말에 아직도 안끝났냐는 듯한 표정의 할머니는, 그럼 뭐라고 불러, 라며 눈길을 피하고는 배시시 웃었다. 그러더니, 계속 이 여자 옆에 머물렀다가는 이롭지 못하겠다 판단하셨던지 다른 자리로 옮겨가셨다.


  채 가라앉히지 못한 감정들을 지니고 혜린은 예정대로 친구를 만나서 커피와 수다를 곁들이며 시간을 보냈다. 다양한 얘기들과 수없이 많은 웃음들이 오갔지만 가슴 한 켠에는 '아줌마'란 단어가 불쾌하게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그리고 문득 의문이 들었다. 왜 아직도 쿨하게 받아들이지 못하지? 아줌마라고 여기는 타인의 시선을.


  81년생 만 서른 여덟. 사회 통념상으로는 서른 아홉. 불혹을 목전에 둔 나이의 결혼 8년차 유부녀. 누가 봐도, 자신이 봐도 '아줌마'라 불리기에 모자라지 않은 스펙이다. 그래도 혜린은 그렇게 불리는 게 싫다. 소름끼치도록 모욕적이고 무례한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직도 그녀는 자신의 정신상태가 20대 중반 언저리에 멈춰있고, 실제로 20대들과 얘기를 나눠도 세대차이가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영(young)하다고 생각한다. 아이를 낳고 키워본 적이 없는 유부녀라는 점도 한몫 했다. 아니 그냥 '아줌마'란 단어 자체가 주는 어감이 우아함이나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억척스럽고 시들고 남루한 이미지가 끔찍스러운 걸지도.


  그러나 그녀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특별히 노안은 아니지만 동안과는 거리가 멀었던 외모. 매일 거울을 볼 때마다 왜이리 늙었냐, 라는 탄식이 절로 나오는 얼굴은 그녀에게 말하는 듯하다. 이제 좀 인정하고 받아들이라고. 몰래 흘러가버린 세월과 그에 걸맞게 숙성된 얼굴과 나이를 가진 나는 이제 누구도 생기발랄한 아가씨로 보지 않는다고. 아가씨가 아니면 아줌마일 수 밖에 없다고. 그러니 이제는 외부에서 훅 들어오는 아줌마 공격에 일일이 민감하게 반응하지좀 말라고.


  오늘 좋은 의도로 혜린에게 말 걸었다가 된서리맞은 그 할머니는 당황하셨을 것이다. 그분의 의식체계에서 아줌마란 호칭은 너무나 평범하고 일상적이었을 수도. 그녀를 기분 나쁘게 하려 했다거나 특별히 더 늙게 봐서 그렇게 부른 게 아니었을 수도 있다. 팔십은 되보이던, 검버섯과 주름 가득한 얼굴로 멋적게 웃으시던 그 할머니께 새삼 죄송해진다. 하지만 그래도 혜린은 아직 아줌마로 불릴 준비가 안됐다. 그래서 앞으로도 한동안은, 그녀가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까지 통통 튀는 공처럼 즉각적이고 공격적으로 대응할 것이다. 저, 아줌마 아닌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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