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내가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거슬러 갈 수 있다면...
1971년의 봄, 서울 인사동의 한 카페로 들어갈 것이다. 그래서 구석진 자리 낡은 쇼파에 앉아서 서로를 수줍게 바라보고 있는 젊은 남녀, 이대봉 씨와 윤경자 씨를 찾아낼 것이다. 단정한 2대 8 가르마에 낡은 양복을 입은 이대봉씨는 흰 피부의 앳된 미남이겠지. 당시 유행하는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는 윤경자씨는 작은 몸에서 넘치는 에너지와 매력을 뽐내는 세련된 아가씨일 테고. 두 사람을 잠시 바라보던 나는 이대봉 씨에게 진심어린 사죄의 말씀을 전한 다음, 윤경자 씨의 손을 잡고 지체 없이 카페를 빠져나올 것이다. 황당하고 어안이 벙벙해서 화내는 것조차 잊고 있던 윤경자씨는 곧 정신을 차리고 이게 무슨 짓이냐 따지겠지. 그런 그녀에게 난 핏대세워 말할 것이다.
이대봉 씨와 결혼하지 마세요. 원래 계획대로 독일에 간호사로 파견나가세요.
더 넓은, 새로운 세상에서 당신의 꿈을 맘껏 펼치세요.
당신이 간호사를 포기하고 여기서 이대봉씨와 결혼한다면
더 많은 것들을 포기하게 될 거예요.
딱히 잘날 것도 없는 아들과 딸을 얻어서 남들처럼 평범하게 늙어갈 거예요.
뭐, 노후는 그런대로 풍요롭겠지만 그래도 당신은
살아가면서 언뜻 언뜻 후회할 거예요.
윤경자씨는, 너무나 젊고 생기발랄한 스물 셋의 그녀는 큰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내게 묻겠지.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그럼 난 바보처럼 울면서 대답할 테지. 10년 후 당신이 낳게 될 딸이 바로 나이니까요, 라고.
대형 서점의 인문 서적 코너에서 우연히 본 책 한권이 나의 생각을 잠시 망상으로 이끌었다. <20대, 세계 무대에 너를 세워라>. 그 책의 저자는 이름난 여성 외교관으로서 젊은 시절 파독 간호사로 나가서 독일인과 결혼해 정착했다. 갖은 고생 끝에 지금의 자리에 올라 화려한 귀향을 한 입지전적인 그녀. 몇 년 전 TV 뉴스를 보던 중 청와대에서 통역을 하며 웃고 있던 그녀를 우리 엄마 윤경자씨는 한 눈에 알아보았다고 한다. 쟤, 나랑 친한 친구였어, 같이 독일에 간호사로 가기로 했던... 저렇게 잘돼서 왔네, 세상에... 감탄과 동경의 눈빛으로 TV를 홀린듯 바라보던 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엄마의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이 딸인 내게 더 진득히 달라붙어 두고두고 되새기게 된 것이...
남원의 시골에서 맨날 전교 1등만 도맡아했던 엄마는 마을의 알아주는 신동소녀였다. 5남매중 장녀이기도 했던 엄마한테 온 식구가 거는 기대는 컸다. 맏이가 잘 되야 집 안이 핀다, 경자가 똑똑해서 가세를 일으켜 세울 것이다, 경자는 뭐가 되도 크게 될 것이다. 이에 부합하듯 엄마의 행보도 거침없었다. 학업을 위해 전주로 유학을 가고 취업을 위해 서울로 가서 자리잡더니 무려 파독 간호사로 지원한 것. 그렇게 '큰 물'로 나아갈 준비가 됐던 윤경자씨는 출국을 얼마 앞두고 그만 우리 아빠, 이대봉씨를 만나 사랑에 빠져버린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 막내아들에 당시엔 보잘것 없던 공무원이라는 직업을 가진 선한 눈매의 이대봉 씨는 스물 셋 아가씨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가족,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독일행은 무산이 되었고 두 사람은 결혼에 골인했다. 애초에 아무것도 없이 시작했던 단출한 신혼생활. 한 푼 두 푼 모아가는 재미, 가재도구와 집 평수를 늘려가고 아들, 딸 키우는 보람으로 이대봉 씨와 윤경자 씨는 남루한 일상을 버텼을 것이다.
아빠의 성실함과 엄마의 영민함으로 우리 집은 점점 형편이 나아져서 그럭저럭 중산층 흉내를 내며 살 수 있었고, 아빠의 퇴직 이후에는 적지 않은 연금으로 두 분이 남부럽지 않은 노후를 보내고 계셨다. 물론 모든 것이 순탄하기만 했을 리 없다. 난데없이 찾아온 암이라는 불청객이 엄마의 몸을, 가족들의 정신을 갉아먹을 때 강하고 에너지 넘치는 내 엄마는 너무나 의연하게 불행과 대면했다. 몇 번의 수술과 고통스러운 회복 과정을 거쳐 마침내 완치 판정을 받았을 때 엄마는 믿지도 않는 모든 종교의 신들에게 감사를 드렸다고 한다. 생의 가장 큰 폭풍이 지나가고 다시 모든 게 잠잠해졌다. 물 맑고 공기 좋기로 유명한 경기도 소도시의 어여쁜 전원주택에서 텃밭을 가꾸며 제철채소를 거둬 반찬을 해먹는 삶, 군민회관에서 패션 페인팅을 배우고 탁구를 치고 강가를 산책하며 가끔 지인들을 초대해 작은 파티를 여는 그림같은 일상. 그래, 이만하면 잘 살아왔고 잘 살고있다, 엄마는 내심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날, TV에서 우연히 본 친구의 모습은 엄마의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으리라. 내가 그 때 저 친구와 같이 독일에 갔었더라면 어떻게 됐었을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겠지. 이모들은 입을 모아, 우리 언니라면 훨씬 더 성공했을 거라고, 언니야말로 그런 글로벌한 삶이 누구보다 어울리는 사람이라며 아쉬워했다. 엄마의 딸인 나 또한 적극 동감했고, 만약에 그랬더라면, 이런 덧없는 상상을 자주 하게 됐다. 엄마는 말했다.
후회하지 않아.
그때 독일에 갔더라면 우리 소중한 딸과 아들을 만나지 못했을텐데.
그럼 엄마는 무슨 낙으로 살았겠니.
난 엄마가 그럴 때마다 괜시리 옆에서 더 열내며 아니라고, 무조건 그때 갔어야 한다고 다그쳤다. 마치 엄마의 장밋빛 미래를 어디 맡겨놓은 양. 그런데 이 상상의 최대 피해자는 아무 잘못 없는 우리 아빠로서, 마치 엄마 인생의 걸림돌인 양 치부되는 점이 참 죄송스럽기 짝이 없다. 분명히 말해두지만 훌륭한 가장이자 무던한 아빠였던 이대봉씨 개인과는 별개로, 내가 여자라서 그런지 같은 여자인 엄마 입장에서 생각했을 때 느껴지는 아쉬움, 스물 셋의 창창한 아가씨가 포기해버린 커다란 무엇에 대한 회한이 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나는 급기야 타임머신을 타고 엄마와 아빠가 사랑을 속삭이던 순간으로 가서 무참히 훼방을 놓아버리게 된 것이다. 제발, 엄마, 아빠랑 결혼하지 말요, 나는 안 태어나도 좋으니 엄마가 원했던 삶을 살아봐요, 어차피 이러나 저러나 똑같이 고생할 거 이왕이면 더 넓은 세상에서 폼나게, 엣지있게, 더 윤경자다운 삶을 살면서!하지만 난 알고 있다. 미래의 딸내미가, 낼 모레 마흔을 앞두고 있는 딸이 불쑥 찾아와 눈물어린 호소로 올바른(?) 선택을 종용하더라도 스물 셋의 내 엄마, 윤경자씨는 웃으며 이렇게 대답하리라는 것을.
10년 후에 꼭 만나자, 내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