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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모사 Jan 11. 2019

깁스의 추억

   서윤의 친한 언니가 손을 다쳐서 팔목까지 깁스를 했다 한다. 전치 2주 나왔지만 그래도 출근은 해야 한다며 울상인 그녀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을 전하며 서윤은 자신의 왼쪽 엄지손가락을 슬그머니 내려다보았다. 얼른 식별이 안 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ㄱ자 모양의 바늘 자국이 보인다. 이게 벌써 몇 년 전 상처인지. 


   사촌과 단 둘이 자취를 하던 20대의 어느 날, 서윤은 난생 처음으로 깁스를 하게 되었다. 발단은 흡착식 플라스틱 칫솔걸이였다. 마트에서 칫솔 4개를 걸 수 있는 칫솔걸이를 사와서 욕실에 세팅해보니 한쪽 부분이 너무 튀어나와서 제대로 설치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서윤은 오른손에 커터칼을 쥐고 왼손으로 본체를 고정시킨 다음 야심차게 돌출된 부분을 자르기 시작했다. 제법 견고한 플라스틱을 뚫기에 커터칼은 너무나 미약했지만 이걸 잘라버리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무식하게 힘주며 계속 칼질을 했다. 



   한 순간이었다. 칼날이 방향을 잃고 빗나가서 칫솔꽂이 대신 서윤의 왼쪽 엄지손가락 아랫부분을 촤악 가른 것은. 새빨간 피가 사방에 튀었고 벌어진 상처 틈으로, 세상에나, 뼈가 보였다. 너무 놀란 그녀는 비명도 못 지르고 멍하니 그 흰 뼈를 응시했다. 살짝 베었으면 오히려 아팠을 텐데 뼈가 보일 정도로 깊게 베이니 아프다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직접 두 눈으로 자신의 뼈를 볼 수 있다는 게 너무 신기했다. 서윤은 나직하게 옆방에 있던 사촌을 불렀다. 


  “현지야. 이리 와봐. 신기한 거 보여줄게.” 

바로 나와 본 사촌은 그녀의 손 꼴을 보고 기겁을 하며 난리쳤다. 

  “뭐야 이거! 어쩌다 이랬어! 괜찮아?! 안 아파?!”

  “괜찮아. 근데 내 뼈 봐라. 진짜 이게 살 아래 있었구나. 색깔 봐. 하얘. 오오, 인체의 신비다.”

  “야! 지금 뼈 보며 그런 말 할 때야? 빨리 병원 가야지. 아, 벌써 9시가 넘었네, 약국이라도 가자, 응?” 


   채근하는 사촌의 말에 서윤은 정신 차리고 피가 철철 흐르는 오른손을 휴지로 둘둘 싸매고 밖으로 나왔다. 시간이 늦어서 문을 연 약국 한 군데를 겨우 찾을 수 있었다. 간단히 응급 처치하고 약 받고 집으로 오니 그때부터 상처가 본격적으로 아려오기 시작했다. 사촌은 걱정 어린 표정으로 같이 있어주겠다 했지만 새벽 출근해야 하는 그 애 처지를 고려해 어서 자라고 옆방으로 보냈다. 지혈을 했다지만 왼손에서는 피가 완전 멈추지 않고 찔끔찔끔 새어나와서 서윤은 밤새 부여잡고 끙끙 앓았다. 정말 길고도 힘든 밤이었다. 



  드디어 날이 밝자마자 서윤은 대충 옷을 걸치고 동네 큰 병원으로 향했다. 상처를 보고 놀라신 의사 선생님이 당장 수술해서 꿰매야 한다고 하셔서 그녀는 홈웨어에 슬리퍼 차림으로 얼결에 수술대에 눕게 됐다. 마취에 들어가면서도 계속 생각했다. 뭐지? 난 단지 칫솔걸이를 제대로 붙이고 싶었을 뿐인데. 왜 지금 수술까지 받게 된 거지? 


  삼십 분 만에 수술은 마무리 됐고 서윤은 그 후부터 3주가량 엄지손가락을 치켜든 형태로 깁스를 하고 다녀야 했다. 그리고 만나는 지인들한테 자랑스럽게 무용담이랍시고 떠들어댔다. 내가 말야, 뼈가 보일 정도로 손을 베였는데 말야, 그래서 수술하고 깁스까지 어쩌고저쩌고 하면 모두 황당해했다. 목장갑은 왜 안 끼고 맨손이었던 거? 아니 애초에, 플라스틱을 커터칼로 썰어보려 했던 패기는 어디서 나온 거냐? 바보냐? 그렇게 폭풍 잔소리를 들어가며 재활치료를 받으러 열심히 병원을 오갔다. 다행히 그녀의 상처는 잘 아물어갔고 3주 후 깁스를 제거한 자리에는 삽질, 아니 칼질의 흔적인 ㄱ자 모양의 상처만 남았다. (베일 때는 그냥 직선이었지만 수술할 때 안전하게 봉합한다고 ㄱ자로 꿰매주셨다.) 


   그때의 여파로 서윤의 왼손 엄지손가락은 지금까지도 자연스럽게 구부러지지 않고 의식해서 힘을 줘야 구부러진다. 오늘 오랜만에 왼손 엄지 아래를 찬찬히 쓸어내리며 아찔했던 그 순간을 떠올리니 간이 서늘했다. 평생 그런 일은 한 번으로 족하다. 자신의 뼈를 볼 수 있었던 건 신기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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