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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모사 Jan 11. 2019

아버지와 피아노

  그 피아노 소리는 인파 속을 가로지르던 연화의 발목을 부드럽게 붙잡았다. 유려하고 매끄러운 연주가 아니었다. 피아노를 생전 처음 배우는 아이의 그것처럼 그저 의미없이 한 음 한 음 두드리는 소리. 주말의 대형 마트 안, 많은 사람들이 내는 다채로운 소리들이 넓은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지만 그 서툰 피아노음만이 유독 그녀의 귓새를 파고들었다.

  멈춰서 고개를 돌려보니 악기 코너 안의 피아노 앞에 선 노인 한 분이 눈에 들어왔다. 감색 버버리 코트에 안경을 쓰고 단정히 빗질을 한 백발에 무표정한 얼굴의, 어디에서든 볼 수 있는 평범한 노인이었다. 한 눈에도 피아노를 다룰 줄 모르는 듯 보이는 그는 하얀 건반을 여기 저기 눌러보고 있었다. 아무도 귀 기울여 듣진 않지만 당신에게는 중요한 의식이라도 되는 듯이 신중하게 하나 하나. 왠지 쓸쓸한 그 모습에 오랫동안 잊고 있던 장면 하나가 불현듯 떠올랐다.


  연화가 어렸을 때 그녀의 집에는 윤기나는 갈색 업라이트 피아노가 있었다. 부모님이 연화와 한살 터울 오빠의 음악적 소양을 위해 구입한 고가의 피아노는 다행히 딸내미인 연화가 싫증 안 내고 꾸준히 배우고 있던 덕에 제 몫을 다 하며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유치원에서 돌아오자마자 고사리 손으로 바이엘이니 체르니를 뚱땅거리는 것이 그녀의 작은 즐거움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별 일없이, 뭉근한 파스텔빛처럼 잔잔하게 흘러갔다.


  그 날도 유치원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연화는 기세 좋게 집으로 뛰어들어가서 가방을 아무렇게나 내팽개치고 피아노 앞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그 앞에 웬일로 아빠가 서 계셨다. 이상했다. 새까만 양복차림의 아빠도 낯설었지만 그 시간에 아빠가 회사가 아닌 집에 계시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늘 해가 지고 깜깜해져서야 희미한 바람낸새, 담배냄새를 품고 현관문을 들어서던아빠였는데. 무엇보다 희한했던 건 피아노를 전혀 칠 줄 모르던 아빠가 그 앞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 오후의 해그림자가 길게 드리운 방 안, 피아노 앞의 아빠는 검은 나무같았다. 


  생각지도 못 했던 장면에 연화가 잠깐 멈칫하는 사이 아빠는 천천히 건반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무심하게, 하지만 분명한 소리를 내며 하나 하나 마구잡이로 눌러지던 희고 검은 건반들... 집 안에 공허하게 울리던 낮은 솔, 더 낮은 레, 높은 미, 라... 무채색으로 우뚝 서 있던 아빠의 너른 등.



  피아노에 한창 재미를 붙여가고 있던 어린 딸은 엉망으로 치는 아빠가 안타까워서, 아빠 그렇게 하는거 아냐 라며 다가가려 했다. 엄마가 옆에서 그런 연화를 가만히 붙잡았다. 엄마 왜애, 아빠가 이상하게 치고 있단 말야. 물기어린 눈으로 엄마는 대답했다. 아빠가 지금 많이 슬프셔. 왜애? 아빠 친한 친구분이 돌아가셔서 오늘 장례식에 다녀오셨거든. 그러니까 잠시 혼자 있게 해드리자. 일곱 살의 아이로서는 얼른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었지만 그녀는 얌전히 내 방으로 돌아갔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 후로도 아빠는 한동안 외로운 연주를 이어가셨다. 해그림자가 사라질 무렵까지.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마트의 악기코너에서 본 한 노인의 모습은 어린 날의 아빠와 무척이나 닮아있었다. 아마 연배도 비슷하리라. 두툼하고 주름진 손가락으로 피아노 건반을 힘 주어 천천히 누르던 그를 보자 연화는 비로소 그날의 아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시대 대부분의 아버지들이 그러했듯이 가슴 속을 열어보이는데 서툴렀던 내 아빠는 소리없이, 하지만 온 몸으로 울고 계셨던 게 아닐까. 무심하게 누르던 건반 하나 하나에 담겨 있던 깊은 슬픔을. 이제야, 너무도 뒤늦게 심장이 저릿해왔다.


  그때의 갈색 피아노는 서른을 훌쩍 넘긴 연화의 곁을 여전히 지키고 있다. 이제는 많이 흐트러진 음정과 빛바랜 기색으로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내보이며. 마트에서 돌아온 그녀는 뚜껑을 열고 피아노 앞에 앉아 한 음 한 음 건반을 눌러보았다. 이 낡은 피아노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파스텔톤의 나날들 속 무채색으로 오롯이 있던 아빠를 그녀가 기억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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