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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모사 Nov 17. 2019

마약

  “넌 마약 같아.”


   예원은 산부인과 수술대 위에 다리를 벌리고 누워 있었다. 매캐한 약냄새가 나자 갑자기 헐떡거리며 속삭이던 그 남자가 떠올랐다, 땀을 폭포수처럼 흘리며 예원의 몸 안을 뜨겁게 들락거리던 그 남자. 탈수 증상이라도 일으키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는 예원을 안을 때마다 온 몸의 땀구멍을 개방하며 미친 듯이 그녀를 먹어치웠다. 허겁지겁. 열흘 동안 물 한모금 못 마신 개처럼. 그는 예원을 탐하고 또 탐해도 갈증이 가시지 않는 것 같았다. 수없이 많은 섹스를 하면서 그는 버릇처럼 예원의 귀에 대고 뇌까리고는 했다. 넌 마약 같아.


   예원은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몸속에서 꽃송이가 퐁퐁 터지듯 기쁨을 느꼈다. 나는 이 남자의 마약이다. 이 남자는 나를 절대 끊지 못한다. 남자의 땀범벅이 된 벌거벗은 등을 하얀 두 팔로 힘껏 끌어안고 등에서 이어지는 탄탄한 둔부를 양쪽 다리로 감싸 안으며 예원은 확신했다. 이 남자는 내 것이다, 라고.


   남자는 갑자기 예원의 인생에 등장했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만한 대기업의 차장인 그는 어느 날 저녁 예원이 아르바이트하는 레스토랑에서 동료들과 식사를 하고나서 손수건을 깜빡하고 테이블에 놓고 나왔다. 그의 아내가 결혼 10주년 선물로 준 그것은 남자가 아끼는 물건이었으므로 다음 날 그는 레스토랑을 다시 찾아 손수건의 행방을 물었고 마침 카운터 근무였던, 손수건을 주워서 매대 아래 고이 간직해두었던 예원은 남자에게 그것을 조심스레 건네며 수줍게 웃었다. 그 순간 스물일곱 살의 청초한 레스토랑 알바생 예원은 남자의 눈에 들어왔다. 감사의 표시로 커피라도 한잔 사고 싶다고 한 건 남자가 좀처럼 하지 않는 충동적인 행동이었지만 의외로 예원이 승낙을 했고 그때부터 모든 게 시작됐다.  



   한동안 예원은 그 남자의 일순위였다. 잘나가는 필라테스 강사라는 그의 아내보다도, 유치원생 아들과 이제 두 돌된 딸보다도. 남자는 시간만 나면, 아니 시간을 내서라도 예원을 만나고 싶어했고 그녀를 안고 싶어했다. 앞길이 보이지 않는 공무원 시험 준비와 알바를 병행하느라 너덜너덜해져있던 예원은 띠동갑인 남자의 품에 안겨 위로받는 느낌이 좋았다. 어디에서도 딱히 원하지 않는 대체 가능한 소모품 취급은 넌더리가 났다. 자기 하나 사라져도 세상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거란 자괴감에 몸과 마음이 조금씩 찢겨나가던 예원에게 남자는 달콤하게 속삭이곤 했다. 넌 마약같아. 그녀의 존재가 그의 마약이었다면 누군가의 삶에 필수불가결한 존재가 된다는 그 황홀한 상황이 바로 그녀의 마약이었다.


   겨울이 되면 꼭 같이 발리에 가자. 옛날에 ‘발리에서 생긴 일’이란 드라마를 보고 막연히 발리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예원은, 공부하느라 알바 하느라 뒷전으로 미뤄두었던 이 소망을 어느 날 남자에게 고백을 했고, 그 말을 들은 남자는 그 후로 자주 다짐했다. 겨울이 되면, 같이 발리에 가자. 그들이 만난 건 초여름이었고, 유난히 더웠던 그해 폭염보다 더 뜨거웠던 그들의 정염은 겨울까지도, 그 이듬해까지도 지속될 듯 보였다. 그러나 가을로 접어들자마자 남자는 돌변했다.


   “집사람이 알아챈 것 같아.”

   그녀의 뱃속에는 3주 된 태아가 자라고 있었다. 예원이 그 사실을 말하자 남자의 얼굴은 차게 굳어졌다. 그런 표정 하지 말아요. 전처럼 다정하게 웃어줘요. 난 당신의 마약이라면서요. 내 안에 당신 아이가 자라고 있어요. 그러니까 안아줘요. 


   다음날 예원의 통장으로 수술비가 입금되었고 핸드폰에는 남자의 마지막 문자가 와있었다. 미안하다 예원아. 여기까지만 하자. 수술 잘 받고 몸조리 잘 해. 미안하다. 예원은 문자를 읽고 또 읽었다. 전화를 했지만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메시지가 흘러나왔다. 문자도 카톡도 소용없었다. 그는 완전히 예원을 자신의 삶에서 배제해버렸다. 마약을 끊어버린 것이다.



   예원은 수술 전날 SNS에서 그의 근황을 볼 수 있었다. 휴가를 받아 발리에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남자는 행복해 보였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예원은 울었다. 남자가 그동안 그녀의 위에서 쏟았던 땀만큼이나 많은 눈물이었다. 

  

   퉁퉁 부은 눈으로 수술대에 누운 예원을 여의사와 간호사는 안쓰러운 듯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예원의 양 손을 한 쪽식 살며시 잡더니, 여의사가 말했다. 자, 마취 들어갑니다. 저를 따라 말해보세요. 다섯, 예원은 갈라진 목소리로 따라했다. 다섯. 넷, 넷, 셋, 셋. 이제는 내가 마약을 끊을 차례라고 생각하면서 예원은 어느덧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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