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 삐- 삐-
늘 듣던 알람 소리가 아니다. 늘 맡던 퀴퀴한 지하 냄새도 아니다. 작지만 거슬리는 저 알람 소리를 끄고 싶은데 눈꺼풀이 말을 안 듣는다. 아마도 난 계획에 실패한 것 같고, 이건 수면제의 부작용인 것 같다. 얼마 큼의 시간이 지난 걸까. 힘들게 들어 올린 눈꺼풀에 보인 건 늘 보던 천장 얼룩이 아닌 눈이 부시도록 켜 놓은 형광등이다.
“잘 주무셨어요, 엄마?”
반지하 방 창문 밖을 지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 가까이에서 들리는 듯 또렷하다.
“병실이 너무 건조하지? 오늘 가습기 좀 갖다 달라고 해야겠어.”
건물 밖에서 하는 말이 들리는 것 치고는 꽤나 또렷하다. 마치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 같다. 청각이 유난히 예민해지는 수면제 부작용도 있는 것일까? 부작용과 함께 계획이 실패할 줄 알았다면 수면제를 남김없이 다 먹을 걸 그랬다. 가까스로 떴던 눈을 감으며 의미 없는 후회를 했다.
“엄마, 그만 자요~ 이따 밤에 잠 못 자.”
내 오른쪽 어깨를 만지며 말하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다시 눈을 떴다. 천장에 꽂힌 시선을 옮기니 바로 옆에서 나를 보며 말하는 중년의 여성이 보인다. 여성의 몸 뒤로 주렁주렁 열려 있는 링거액이 보인다. 늘 듣던 알람과 달랐던 그 소리는 바이탈 사인 모니터였다. 오선지를 대신하는 색색깔의 그래프가 모니터의 메트로놈 소리에 맞춰 가냘프게 움직였다. 그렇다. 여긴 내 방이 아니다.
어젯밤 우리 집에 올 사람이 없었을 텐데… 수면제를 먹은 나를 발견한 누군가가 병원으로 데려왔나 보다.
‘그런데 이 여자는 누구지?’
묻고 싶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기력이 없다.
우리 엄마가 살아 있었다면 이런 모습일까? 애써 눌러 담았던 ‘엄마’라는 존재가 문득 떠오르게 하는 중년의 여성이다.
이때 병실 문을 열고 의료진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여럿 들어온다. 의사 가운을 입은 남자가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이서은님~ 잘 주무셨어요? 지난밤에는 통증이 좀 잡혀서 다행이에요. 오늘은 이서은 님이 좋아하시는 원예 요법이 있는 날이에요. 복수가 차서 조금 힘드시겠지만, 오늘 즐겁게 꽃꽂이하셨으면 좋겠어요. 내일 상황 보고 복수 배액 시술 일정 잡아볼게요.”
죽다 살아난 사람을 보면서 꽃이니 뭐니 웃으면서 말하는 의사도 이상한데, 복수가 찼다는 건 또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가 안 되었다. 옆에 있던 하얀 가운의 여자가 말을 보탰다.
“오늘 이서은님이 좋아하는 은방울꽃이 가득 이예요. 자원봉사자님이 이번주도 이서은님을 위해서 은방울꽃은 꼭 챙기셨다고 해요. 그러니까 이따 힘내서 식사하시고, 오후에 원예 요법하러 오세요.
상글상글 웃으며 말하는 이 여자가 호스피스 복지사라는 걸 알기까지는 며칠의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내가 여든 살의 노인이라는 걸 이해하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나는 지금 여든 살의 난소암 말기,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 중인 환자다.
은방울꽃 꽃말
언젠가 찾아올 행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