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은 뒤통수에도 눈이 있단다.
작은 일에도 쉽게 얼굴을 붉히며 당황스러워하는 성격의 소유자, mbti가 세상을 휘젓기 전 혈액형을 논하던 시절엔 모든 주변인이 A형이란 걸 맞춰버렸다. 현시대에는 16분의 1이라는 mbti 확률을 절대적인 1로 만들어 버린다. 확률 따윈 필요 없는, 누가 봐도 I니까.
회사 직원들과 동료 강사들과 수줍게 인사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너무 바빠서 개인적인 연락은 늦은 밤 퇴근 후에야 확인하곤 하지만, 수업이 진행되는 강의실에서 만큼은 나의 모든 게 변해버린다.
아이들이 하나 둘 도착한 교실에서는 아직 낯선 공기가 깔려 있는 듯하다. 가볍게 그날 하루에 대한 이야기를 건네며 웜업을 한다. 학교 급식은 맛있었는지, 숙제는 어렵지 않았는지. 주기적으로 보는 아이들이지만 순간 낯설게 느껴지는 공기를 매번 느낀다. 모든 관계에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예민한 성향 탓일까.
이런 공기를 한 순간에 바꿔 버리는 건 수업이 시작된 후, 모든 아이들이 교실에 들어오고 문이 닫혔을 때이다. 문을 닫으면 외부 세상과 단절된 나만의 세계가 펼쳐진다. 마치 칠판이라는 무대에 선 연기자가 된 것 같다.
아이들과 지속적으로 함께 수업하며 쌓아온 시간도 있지만, 아이들의 컨디션이나 기분 파악도 빠른 편이다. 외부 환경이 학습에 많은 영향을 끼치는 초등 저학년과 수업하기에, 이런 나의 예민한 성향이 도움이 된다. 예를 들면 그날따라 유독 집중하지 못하는 학생에게는 그동안의 좋은 학습 태도를 거론하며 능동적으로 개선해 나가도록 유도한다.
"늘 좋은 태도로 선생님을 집중해서 보는 OO인데, 오늘따라 선생님을 안 보네?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어?" 이런 질문에 아이들은 본인 학습 태도에 대한 인지를 하게 된다. "그래서 힘들고 피곤했구나... 그래도 OO 이는 집중하려고 노력하는 똑똑이잖아? 그런 노력하는 마음이면 돼."이렇게 마음을 이해하는 듯 말해주면, 아이들은 보란 듯이 '노력하는 학습태도'를 보여주곤 한다.
그럼에도 몸이 늘 마음을 따를 수는 없다. 개별적으로 문제를 풀어나가는 소위 '개인 집중 시간'을 가질 때, 한 명씩 채점해 주고 개별 지도를 한다. 본격적으로 집중 못하고 태도가 흐트러지는 아이들에겐 '선생님은 뒤통수에도 눈이 있단다.'를 시전해 보인다. 다른 학생을 채점하면서도 "OO아, 바르게 앉아." 하고 말하면 멍 때리던 학생은 흠칫 놀라 묻는다. "선생님, 안 보고도 어떻게 아셨어요?" 천연덕스럽게 나의 눈이 뒤통수부터 여기저기에 다닥다닥 붙어 있음을 말해준다. 아이들은 재밌어하면서도 내가 보지 않는 순간까지 조금의 긴장을 하게 된다.
칠판 앞에서 펼쳐지는 나의 연기는 장르를 넘나 든다. 문제를 읽어야 하는 타이밍에 멍하니 나를 보고 있는 학생에게는 "선생님 너무 좋아하지 마, 수업할 땐 수학 문제를 좀 더 사랑해 봐."라고 하며 아이들을 질색하게 만들기도 한다. 작은 잔소리는 이렇게 유머를 곁들여 넘어간다. 3시간 동안 수학 수업을 듣는 아이들에게 이 정도 재미는 필요하다.
물론 잔소리 게이지를 차곡차곡 쌓아 간 학생에게는 따끔한 꾸중이 주어진다. 조용하고 나긋한 목소리로 나름의 재미를 곁들여 수업을 하다가, 단호한 어조로 이름 석자를 부르면 우리 반 아이들은 무언가 잘못했음을 직감한다. 평소 이름에 성을 붙이지 않고 따뜻하게 불러주다가 성을 붙여 낮은 어조로 이름을 부르는 게 이렇게 효과적이라는 건 경험을 통해 터득했다. 이름 석자를 부르며 굳어진 표정으로 쳐다보면 마치 저승사자에게서 이름이라도 불린 듯 교실 공기가 순간 얼어붙는다. 안타까운 건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초등학생들이란... 돌아서면 잊고 금세 다시 까불까불 행복한 생명체가 되어 버린다. 그래서 더 사랑스럽기도 하지만 우르르 몰려 앉아 있는 초등학생들을 컨트롤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간혹 저승사자가 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칠판 앞에서 연기에 몰두한다. 조금만 잘해도 과장해서 놀라며 말한다. "내가 천재들을 가르치나 봐, 행복해." "이런 어려운 걸 어떻게 이해해? 응용문제도 풀어볼 수 있겠어?" 이런 나의 반응에 아이들은 뿌듯해하면서도 별거 아니라는 듯 다음 문제도 혼자 풀어보겠다며 나선다.
어려운 개념을 이해하고 응용문제를 풀어야 하는 날엔 '고민 있는 선생님'연기가 필요하다. "하... 이건 정말 어려운 문제인데, 우리 반은 솔직히 처음엔 어려워해도 결국엔 잘 이해할 거 같거든? 보통 다섯 번 정도 노력해야 한 문제를 이해할 수 있다는데, 우리 반은 세 번 정도면 될 것 같아." 이렇게 이야기하면, 초등 저학년의 허세가 발휘된다. "아닌데요? 우린 집중해서 들으면 한 번에 이해할 수 있는데요?" 어린이나 어른이나 접근하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어렵지만 해보겠다는 마음으로 작정하고 뇌를 작동시키면 정말 더 잘 이해하곤 한다.
열심히 문제를 풀고 있는 아이들을 볼 땐 '독백 타임'을 갖기도 한다. 물론 청중이 다 들을 수 있도록 하는 큰 혼잣말이다. "이렇게 태도가 좋고 열심히 하니까, 실력이 자꾸 느는 거구나..." 칠판을 지우면서 독백을 하고 돌아서면 자세까지 고쳐 앉아 더더욱 열심히 문제를 푸는 아이들을 볼 수 있다. 똑바로 앉아서 집중하라는 잔소리보다 훨씬 효과 좋고 서로 기분 좋아지는 순간이다.
아프다는 학생에게는 잔뜩 걱정하는 눈으로 예쁜 밴드를 챙겨 와 정성스럽게 붙여준다. 하루에도 나를 거쳐가는 '페이퍼 컷'환자들이 수두룩이다. 부모로부터 인증된 꾀병 꼬마환자들도 있는데, 그런 학생들에게 꾀병 부리지 말고 공부하라는 말 보다 더 효과적인 멘트가 있다. "119 부를까?! 선생님이 업고 병원 갈까?!" 당장이라도 업고 뛸 기세로 핸드폰을 들어 보이며 물으면 반 아이들이 모두 웃어 보이고, 꾀병 어린이도 슬쩍 웃으며 넘어간다. 행여나 119를 정말 부를까 싶어 '아직은 괜찮다'는 말과 함께.
연기자 선생님도 사람인지라 종종 힘들 땐 연기력이 떨어지곤 하지만, 장단 맞춰주며 즐겁게 수업을 따라오는 아이들이 작용 반작용의 힘을 주기도 한다. 수업이 끝나고 교실 문을 나서면 다시 수줍모드로 돌아간 채 교무실로 향한다. 충전될 틈도 없이 다시 다음 무대, 아니 수업을 준비해야 하지만 순수로 무장한 우리 반 아이들 덕분에 교실에서 방전되는 일은 없다.
연말이면 우리 반 아이들은 산타 할아버지의 방문만큼이나 기다리는 게 있다. 과연 선생님이 연기대상을 받을 지에 대한 것. 믿기 어렵겠지만 연기자 선생님이라는 닉네임 덕분에 정말 연기를 하는지에 대한 여부가 교실 안에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동심은 감히 이해할 수 없고 때로는 고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