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들과 함께 하는 12월
지난 첫눈을 보고 설레던 마음 한편에 출근 고민을 했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지만 마음은 언제나 이십 대인 것 같았다. 거울 속에 비친 나의 주름을 애써 모른 척했건만, 첫눈을 보고도 동요하지 않는 심장을 보면서 나이를 실감했다.
어린 시절 생일 다음으로 가장 신났던 크리스마스를 떠올린다. 11월 달력을 뜯어내며 시작되는 기분 좋은 기다림이 생각난다. (모든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어린이날에 태어난 숙명으로 어린이날을 따로 좋아한 기억은 없다. 오히려 '오늘은 내 생일이야!'라고 우기느라 바빴다.)
1월 1일 TV롤 보는 보신각 종이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신호탄인 것 같아 마냥 설레었다. 게다가 겨울방학은 길고 길었기에 연말, 연초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유독 이번 연말에는 설렘보다 쓸쓸함이 앞선다. 이렇게 또 넘어가버리는 한 해를 붙잡고만 싶은 탓일까.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라는데 어떤 후회가 더 많았던 걸까...
교실에서 매일 마주하는 아이들은 설레는 12월을 시작한 듯 했다. 쉬는 시간에 아이들 사이에서 작은 언쟁이 있었는데, 아이들이 사뭇 진지해 보였다.
"산타 할아버지는 정말 있다고!"
"아니야, 그건 엄마, 아빠가 우릴 속인 거야!"
산타 클로스를 믿지 않았던 아이는 반에서 단 한 명이었지만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삼 남매의 막내라서 이미 산타 클로스의 내막을 알아버린 듯했다. 중학생 형이 동생의 동심을 지켜주지 않은 탓에 우리 반 아이들 모두가 산타 클로스의 진실을 알게 될 위기였다. 하지만 나머지 모든 아이들이 산타 클로스의 존재를 확신했기에 머릿수에서 밀리는 싸움이었다.
혼자서 고군분투하던 학생은 자신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나에게 쪼르르 달려와 물었다.
"선생님, 산타 할아버지는 없죠? 어른들이 우리 속이는 거죠?"
순간 반 안은 정막으로 가득 찼고, 모든 학생들이 일제히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나의 대답에 촉각을 곤두 세웠다. 직업병인 걸까... 내가 입을 떼고 말한 첫 문장은 따분한 잔소리였다.
"얘들아, 수업시간에 이렇게 집중을 잘해봐, 응?"
그리고 산타 클로스의 동심을 지켜주기 위한 신명 나는 거짓말이 시작됐다. 아이들이 순수하게 다 믿어 준다고 가끔 신이 나서 거짓말을 한다.(미안, 얘들아...)
"산타 할아버지 있어. 매년 12월에 과로하셔서 1월에 링거 맞으시는 거 몰라? 생각난 김에 산타할아버지께 카톡 드려야겠다. 오늘 태도 안 예뻤던 학생이 누구더라..."
어두운 방에 불을 켜면 사사삭 숨어 버리는 바퀴벌레처럼, 비유는 좀 징그럽지만 우리 반 아이들이 빛보다 빠르게 사사삭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혹시라도 산타 할아버지한테 카톡으로 이를까 싶어 초롱초롱한 눈을 무장한 채로.
요즘 아이들 성숙하다고, 여기 대치동 아이들은 초등학교 1학년이지만 학습 수준은 3-4년씩 앞서 간다고 무시하면 안 된다. 동심으로 가득 찬, 똑같은 어린이들이다. 덕분에 나는 그들에게서 '산타와 연락하는 셀럽'이 되었다.
수업이 끝나면서 아이들에게 팁을 하나 줬다. 크리스마스에 산타 할아버지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에게도 조금은 더 설레었던 작년 크리스마스에 산타 위치추적을 했었다. 북미항공우주방위사령부(NORAD)에서 산타 추적 이벤트를 매년 실시한다. 60년이 넘는 유서 깊은 연례행사로서 미군, 캐나다군이 준비하며 미국 대통령과 캐나다 총리 역시 이 이벤트에 참여한다. 이 추적기는 크리스마스이브인 12월 24일에 열리고 26일 0시에 종료된다. 산타의 현재 위치를 지도 위에 표시해 주는데, 이는 NORAD의 첨단 레이더 기술 덕분이라고 한다나... 나보다 통 크게 거짓말하는 사람들을 보니 뒷배가 든든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인 1948년부터 시작된 어른들의 장난은, 크리스마스이브에 미공군이 시작했다. "우리 측 조기경보 레이더가 14,000피트 상공에서 8마리의 순록이 끄는 정체불명의 썰매를 감지했다"는 성명을 언론에 발표했고, 이 메시지가 실제로 신문에 보도되었던 것이다. (나무위키)
현재까지 이어진 어른들의 거짓말은 참으로 열심히 진행되었다. NORAD 홈페이지로 오는 이메일 문의나 전화는 미군, 캐나다군 외에도 천명이 넘는 자원봉사자들이 담당하고 있다고 한다. 어린이들 문의가 폭주해서 늘 일처리가 밀리고, 미셸 오바마도 자원봉사에 참여할 정도였다. 이쯤 되면 동심을 지켜주고자 하는 어른들의 노력도 인정해 줘야 할 것 같다.
나의 말을 들은 아이들은 설렘이 증폭되는 듯했다. 택배 배송 문자를 보고 설레어하며 기다리는 나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도 나는 정상수업을 할 예정이다. 크리스마스에 수학 수업이라니, 아이들은 잔뜩 뿔이 난 채 수업에 오기도 하지만 이번엔 다를 것 같다. 수업하면서 산타 할아버지의 위치를 같이 공유하며 함께 즐거워할 생각에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어쩌면 나에게도 조금은 설레는 크리스마스가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