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스피스 병동 이야기
삶이란 우산을 펼쳤다 접었다 하는 일이요
죽음이란 우산이 더 이상 펼쳐지지 않는 일이다
- 김수환 추기경의 '우산' 중에서 -
"언니! 봉사자분들 오셨어. 언니도 발마사지 신청해."
언니라고 부르던 사람이 부산스럽게 발마사지를 준비했다. 남편의 병실 침대를 벽에서 조금 떨어뜨려 놓은 후 다리 밑에 패드를 깔았다. 남편이 발마사지를 하는 동안, 마치 본인이 발마사지를 받는 것처럼 시원해했다. 중간중간 남편을 향해 "여보, 좋지? 시원하지?"라고 물었지만, 두 눈을 감고 있는 남편의 얼굴엔 산소 호흡기 소리만 뿜어져 나올 뿐이었다.
드디어 그 '언니'의 남편 차례가 되었다. 그들은 같은 병실에서 남편을 간병하는 보호자로 만났다. 호스피스 병동에 상주하며 남편을 보살폈기에 다른 가족보다 더 오래 보는 사이가 되었다. '언니'의 남편은 거동이 가능했다. 그리고 유쾌하게 말을 할 수 있는 상태였다. 마사지하는 발을 내려다보며 못생기고 냄새나는 발을 들이밀어서 어떡하냐고 부끄러워하셨다.
한 세월을 살아낸 발을 보자면... 사실 못생긴 발이 많다. 하지만 수없이 많은 발을 마사지하며 한 번도 눈살을 찌푸린 적이 없다. 오히려 두 손으로 꼭 감싸 쥐고 마음을 밀어 넣는다.
두껍게 변해버린 발톱과 휘어버린 발가락, 뼈만큼이나 단단해진 굳은살까지. 그런 발을 보며 눈에 뻔히 보이는 선의의 거짓말 대신 진실한 마음을 표현한다. "이 멋진 발로 평생을 열심히 살아오셨는걸요."
"맞아요. 우리 남편 참 열심히 살았어요." 곁에 있던 보호자가 마치 어제를 회상하듯 말했다. 성당에 다니면서 봉사 많이 하셨다고, 이렇게 착하게 살아온 내 남편이 몹쓸 병에 걸려서 고생하는 걸 이해할 수 없다고.
가만히 듣고 있던 맞은편 보호자가 말을 이었다. "언니, 우리 집 양반도 그래, 절에 다니면서 그렇게 착한 일을 많이 했는데, 신도 너무하시지..."
신을 원망했을 것이다. 평생 따랐던 신을 부정하기도 했으리라. 그러다 지푸라기라도 잡듯 신의 바짓가랑이를 꽉 쥐며 애원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 모든 시간을 건너 오늘이 되었다.
발마사지를 하며 조용히 지켜보던 환자가 성호를 그었다. 그리고는 세례명으로 아내를 불렀다. "마리아, 인간은 누구나 다 죽어. 여기서 다 듣고 계실 텐데 예수님이랑 부처님이 서운하시겠네."
병실 안에 웃음이 퍼졌다. 마치 어제까지 내리던 비가 언제 그랬냐는 듯 맑게 개인 가을하늘 같았다. 언젠가 둘 중 한 명이 먼저 병원생활을 정리하고 떠나겠지만, 언니 동생하며 서로를 위로하던 시간은 오래 남을 것이다. 남편의 부재를 대신할 수 있는 건 없겠지만 같은 시간 속에서 같은 아픔을 겪은 서로가 우산이 되었을 것이다. 폭우 속에서 함께 나눠 쓴 우산, 적어도 혼자 우는 일은 없었으리라.
호스피스 병동에 있으면 개인적인 종교와 별개로 세상의 모든 신을 만나는 것만 같다. 참으로 오랜만에 병실이 가득했다. 예수, 부처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신이 한데 모였다.
누군가를 향한 나눔은 '함께 하는 것'이다. 그 사람의 마음 옆에 내 마음을 두고 함께 하다 보면, 타인의 종교가 무엇이든 함께 붙잡고 싶어진다. 함께 바짓가랑이를 잡고 고통 없는 편안한 밤을 애원하곤 한다.
한 사람이 또 한 사람의 우산이 되어줄 때
한 사람은 또 한 사람의 마른 가슴에 단비가 된다
- 김수환 추기경의 '우산'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