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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끝자락이었다.

by 미묘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 흘러가는 듯 느끼는 건 단순한 착각이 아니다. 새롭고 풍부한 경험은 생생한 기억으로 저장되어 시간 간격을 더 길게 인지하도록 한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반복되는 일상 속 새로운 경험의 빈도가 줄어든다. 이는 기억의 밀도를 낮게 만들고 상대적으로 시간이 빨리 흘러가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지난 2주를 떠올리면, 기억에 남는 일이 거의 없다. 나의 시간은 화살촉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직장인들에게는 꿈같은 휴가가 기다리고 있는 여름. 대치동 강사로 살아가는 나에게는 여름 방학 특강이 있다. 주 6일, 2주간의 특강 기간 동안 하루 13시간씩 꼬박 일했다. 오전부터 출근해야 하는 특강 기간에는 호스피스 병동에 가지 않는다.


입추가 지났지만 여전히 가을은 멀리 있는 듯 햇살이 뜨거웠다. 오랜만에 느끼는 자유로움이 좋았다. 종종 귀차니즘이 발동해 집에서 푹 쉬고 싶은, 호스피스에 가기 싫은 월요일도 많았다. 회사 출근에 금융치료가 효과적이라면 호스피스 봉사엔 여름방학 특강이 명약이다. 모처럼 출근 안 하고 병원에 가는 발걸음이 참새처럼 통통거렸다.


몇 주 만에 마주한 환자 명단에는 낯선 글자가 수두룩했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흘러가는 3주라는 시간은 상대성 이론을 여실히 체험하게 한다.


암성 통증으로 고통받는 환자에게는 1분 1초가 억 겹의 시간처럼 느껴질 것이다. 마약성 진통제로 통증을 완화시킬 수 있다면 흐릿한 기억으로 하루하루 뿌옇게 보내기도 한다. 중간중간 또렷해지는 순간에는 자리를 지키던 가족과 소중한 찰나를 보낸다.


가족을 간병하는 보호자들에게도 시간은 제멋대로 흐를 것이다. 힘들어하는 환자를 보며 무력감에 발만 동동 구른다. 링거에 떨어지는 진통제를 한 방울 한 방울 세어 나가는 시간은 더디게만 느껴질 것이다. 결코 흐르지 않을 것만 같은 시간도 결국에는 흘러 버리고 나면 평온해진 환자를 보며 안도와 회한을 동시에 맞이한다. 마지막 순간에 다다르면 야속하게 흘러 버린 시간 앞에 무너져 내리기도 한다.


3주 전 내 눈에 익숙했던 몇몇 환자가 명단에 보이지 않았다. 깊게 생각하지 않고, 스스로를 속이는 시간이다. '전원 가셨겠지. 집으로 퇴원하셨을 거야.'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환자들에게 조심스럽게 말벗이 되어 드린다. 발마사지를 하며 마음을 어루만진다. 그들의 발 끝에는 심장이 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여전히 햇살이 뜨겁다. 애써 외면했던 사실이 아무렇지 않게 불쑥 고개를 내민다. 그들은 집으로 퇴원하지 않았다. 다른 병원으로 옮겨 가지도 않았다.


발마사지 끝에 힘겹게 감사하다는 말을 꺼내던 그들의 얼굴이 햇살 사이로 아른 거렸다. 여름의 끝자락이었다.









#호스피스 #자원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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