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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호 Aug 04. 2021

늘 타던 열차를 타지 못했어도 불평하지 않은 일

[아침 8시 39분], 5장

<5>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지하철에서 그 여자를 만난 날 이후로 말이다. 소름 돋게도 매일 같이 그녀 눈치를 봤다. 아 물론 전철 플랫폼에서 눈치를 살폈다. 나도 내가 왜 이렇게 그 여자를 신경 쓰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것도 물론 한 3일쯤이나 그랬었지, 지금은 그냥 일상 같은 일이 되었다.

  오늘 아침도 칼퇴나 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출근을 한다. 그리고 여전히 8시 39분 지하철이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중. 그리고 여전히 나는 그 여자를 신경 쓸 준비를 한다. 두리번두리번 그녀를 볼 생각이지만, 그녀를 보지 않는 척 시선을 스쳐 지나가듯 비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데 오늘은, 그녀가 보이지 않는다. 이제 30초 후면 지하철이 들어올 텐데, 게으른 그녀는 아직도 스크린도어 앞에 서지 못했다.


  "언제 오는 거야.. 늦잠이라도 잤나.."


  제시간에 전철이 도착했고, 나는 그 전철을 탔고, 그녀는 그 전철을 타지 못했다. '띠리링 띠리링'하는 요란한 안내음과 함께 전철 문을 닫겠노라고 통보를 한다. 평소에는 그렇게 지하철 시간을 어기면서 왜 이리도 시간을 잘 지키는지 원. '아직 그녀가 타지 못했다고!' 나는 실제로 그녀가 나의 지인이라도 된 듯, 열심히 일하는 이 지하철을 이렇게나 욕하고 있다. 문이 닫히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고개를 쭈욱 내밀었다. 나 때문이라도 문이 닫히지 않았으면 해서. 그리고 결국 나는 그 문턱이라는 선을 넘어 지하철을 내려버렸다.


  "내가 이걸 내린다고?"

  "진짜 미쳤다 미쳤어."


  그렇게 스크린도어는 닫혔고, 나의 아침 8시 39분 열차는 떠난다. 아무도 봐주지 않는 이 열성에 아무도 몰라주는 나의 민망함을 오로지 나 자신만이 느끼고 느낀다. 주책이다 정말. 열차가 서서히 움직인다. 그리고 그 흘러가는 열차의 속도를 곁눈 짓으로 느꼈다. 아 떠나간다 나의 39분 열차.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무언가를 크게 잃은 마냥 꽁꽁 얼어붙은 얼음이 되었다. 그 이유는 내가 탔던 그 열차칸의 옆, 옆, 다시 말해 2칸 뒤에 그녀가 숨을 헐떡 거리면서 탑승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순간 살짝 허탈했던 것 같기도. 계단 바로 앞 칸이 바로 저 칸이었을 것이다. 집에서 조금 늦게 나와 뛰어서 들어오는 열차를 후다닥 타는 그녀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리고 그 여자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 두 손으로 안면의 빛을 차단한 채 열차 유리창에 눈을 가까이 대고선, 놀란 눈이면서도 거대한 눈으로 나를 의식하고 있다. 그리고 내 고개는 열차의 움직임과 같은 힘과 가속도로 느리면서도 빠르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움직인다. 그녀를 눈에서 뗄 수 없다.


  "그녀가, 나를, 보고 있다."


  지하철은 놓쳤지만, 나는 꽤나 큰 수확을 한 것만 같다.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그녀'도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것이 단순한 의식이든, 사소한 흥미든, 과한 관심이든, 자그마한 애정이든, 더 나아가 우정이든, 타지 못한 지하철에 작은 연민이라도, 그녀가 나에게 느꼈다면 그걸로 큰 수확이다. 온 신경이 부끄러우면서도 온 신경이 설레고 있다. 이것은 사랑일까.


  전 대리님은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내가 출근 버튼을 누르기도 전에 어제의 업무에 관해 묻는다. "저 출근 좀 찍고 가겠습니다."라는 한 마디에 아마도 대리님의 심기가 은근슬쩍 요동쳤을 것이다. 이렇게나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것은, 그는 그런 사람이다. 들어보지도 않고 딱 잘라 출근을 찍겠다고 하는 후배가 본인은 마구 불편할 것이다. 그래도 할 건 해야 한다. 출근을 찍지 않아서 받는 불이익은 누구도 내 대신 책임져줄 수 없다. 특히나 전 대리님은 더욱이 그럴 것이다.


  "어제 제가 요청드린 계획안이 아직 안 들어왔던데, 혹시 얼마나 됐어요?"

  "오늘 마무리해서 드리겠습니다"

  "오늘? 언제?"

  "금요일까지 필요하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그건 그런데..."


  어제 보냈어야지 왜 보내지 않았느냐고 말하려는 대리님의 레퍼토리는 수도 없이 많이 들어왔다. 늘 이런 식이다. 처음에는 이런 대리님에 치여, 요청받은 업무를 딱딱 그날 처리하고 퇴근했다. 그랬던 상황은 지금의 상황과 다르다. 나도 꽤나 오랜 시간 이 회사에 붙어 있었고,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일은 대리님의 수발만이 아니다. '왜 야근을 해서라도 해 놓고 가지 않냐'라고 묻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미안한데, 그런 건 공채 놈들이나 그렇게 부탁드립니다.'

  '저는 책임감의 무게가 다른 '급' 낮은 계약직입니다.'


  일을 느긋하게 하겠다며, 꽤나 아무런 일이 아닌 듯이 떠들어대는 새파랗게 젊은 주임이 아니꼽겠다. 그렇다고 한들 자기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이기에, 분명 내가 해줘야 하는 일이기에, 내 기분을 맞춰주어야 할지, 이번 일을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지 고민하는 중인 듯하다. 전 대리님의 말끝이 흐려지는 일 또한 그리 흔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은 왠지 모르게 목소리를 내고 싶다. 그냥 조용조용히 타인과 아무 일 없이 지나가는 그런 날들을 원했었지만, 오늘 만은 아니다. ‘이제는 못 참겠다' 마인드로, 나와 날 건드리는 당신의 사이가 서로 민망해지지 않을 정도만큼만, 오늘의 나는 작은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그저 나는 별 다른 생각 없이 회사를 다녔기에, 사실 그렇게 성이 나는 내가 아니라고 나 자신을 소개할 수 있었는데,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 마치 신선하면서도 감각적인 날이다.

  오늘은 왜 이럴까. 마치 믿는 구석이라도 생긴 것일까. 오늘 비로소 누군가가 나를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인 걸까. 나에게 그 사람이 그렇듯이, 그 사람에게 내가 무언가 특별한 사람이 되었다고 괜히 기대 중인 걸까. 퇴근길에 그 여자를 마주친다면 나는 왜 오늘 아침 그녀가 유리창에 눈을 붙이기까지 하면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지 물어볼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까. 그래도 될까.


  오후 6시에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간단한 인사를 남기고, 9분을 힘차게 걷는다. 그렇게 그녀를 만나러 간다. 여느 때의 퇴근길과는 사뭇 다르다. 내 자유를 위한 칼퇴가 아니다. 누군가를 위한 칼퇴다. 아니지 누군가를 보고자 하는 나를 위한 칼퇴다. 늘 그랬듯이 그 여자가 9분 차를 타기 위해 내 옆으로 나를 모르는 체하면서 내 옆을 지켰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런 그 여자에게 이렇게 물을 테다.


  "아침에 늦잠 주무셨나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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