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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va Feb 01. 2017

그들은 <논어>의 어떤 매력에 빠졌나.

신영복 씨의 <강의> 4. 논어, 인간관계론의 보고

신영복 씨의 <강의> 4. 논어, 인간관계론의 보고


 강의에 나오는 고전 중에 사전에 읽는 몇 안 되는 고전 중의 하나가 우리의 삶에 깊게 뿌리 박혀 있는 논어다. 처음 논어를 읽으면서 신기했던 점은 교과서처럼 줄글로 줄줄 어려운 철학들을 늘어놓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짧고 간단하게 정수를 찌른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술술 넘겨서 하루 만에 읽을 수도 있었고, 한 구절을 고심해서 읽으면 하루에 한 페이지를 읽을 수도 있었다. 대부분의 구절은 뭐를 말하고 싶은 거지? 하고 갸우뚱했다. 또, 논어를 읽으면서 가끔 나오는 여자에 관한 구절이나 상하를 나누는 구절에서 “이래서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던가..”라고도 생각했었다.

 저자는 논어를 강의하기에 앞서 “과거의 담론을 현대의 가치 의식으로 재단하는 것만큼 폭력적인 것도 없다.”라고 말을 하는데, 처음 논어를 읽을 때는 모든 것을 지금의 나에 대입해서 읽다 보니 오늘의 시점에서 그것을 판단했던 것 같다. 논어 부분을 읽어나가기 전에 이미 이 부분에서 저자의 논어 강의가 너무 기대되면서 읽을 수 있었다.


 책에서는 논어의 몇 가지의 구절들을 심도 있게 해석한다. 전체 논어를 이렇게 해석해서 내신 책도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인용되는 구절들은 대체로 일반에 잘 알려지고 많이 이용되는 구절들이나, 그 해설에 있어서 무릎을 탁 치며 읽었다.     


 ‘학이시습지면 불역열호’ :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     

 학이 편의 논어의 첫 구절에서 알고 있던 해설은 한글로 번역했을 때의 의미 그대로 받아들이며 배우고 익히는 것이 기쁘다는 의미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신영복 씨는 습을 익히다는 의미가 아닌, 실천의 의미로 해석하고 시는 때때로가 아닌 적절한 시기로 해석하여, ‘배우고 적시에 실천하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라는 뜻으로 해석하게 된다. 이렇게 해석하고 나니, 새로운 해설이 더 알맞은 것 같다. 배우고 나면 적절할 때에 실천을 해야 지속적인 배움이 되고, 또한 배우고 익히는 것은 비슷하지만 실천하면 적용해보면서 기쁨을 더욱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온고이지신 가이위사의’ 역시 옛것을 익혀서 새로운 것을 안다는 의미인데, 시간의 관념에 대한 신영복 씨의 한 방은 미래에 대해 고민하고 있던 좋은 영감을 던져준다. 어떤 직업이든 미래에 대한 고민은 동반될 것이다. 특히 요즘처럼 전문성이 대두되다 보니, 내 분야에서는 ‘척척박사’, 다른 분야에서는 ‘바보’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럴수록 미래의 격변이 두려워지기 마련이다. 나 역시 진로를 결정하기에 앞서서 내가 연구하게 될 분야는 미래에는 어떨 까? 당장 3년 후나 현재에 각광받는 분야 말고 내가 10년 후 연구를 주도적으로 하게 될 때는 어떤 연구가 중요해질까? 적어도 내가 하는 연구가 ‘무. 쓸. 모’가 되는 경우는 피하고 싶은데 말이지.라고 생각하며 참 고민이 많았다. 아무리 고민해도 미래는 참 막막하고 알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미래를 절대적으로 새로운 것으로 인식하는 것에서 온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개념 역시 사유로서 정해진 것일 뿐 실체가 아니며 현재를 거쳐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온고함으로써, 새로운 미래를 알고 나아간다는 것이다. 즉, 지금 내가 고민하고 있는 문제는 나 혼자 고민함으로써 해결할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던 온고를 탄탄히 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그렇다. ‘어떤 연구를 해야 할까?’하고 고민하고 있었는데, 제대로 과학사를 공부해 본 적도 없었고, 어떠하게 과학이 발전해왔는지에 대한 맥락이 뚜렷하지 않았다. 또한 유능한 과학자들은 어떻게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고 그 과정들이 어땠는지에 대한 파악이 부족했다. 단순한 호기심만으로 연구를 시작하는 것은 아니고, 그 호기심 역시 어떠한 배경에서 유발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군자불기’는 참 좋아하는 구절이다. 처음으로 마주친 것은 KBS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에서였다. 고등학생 때 재밌게 봤던 드라마였는데, 이 구절을 말하던 정약용의 모습에 뿅! 하고 반한 것도 큰 영향을 줬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는 저자와 조금은 다르게 해석을 했다. (신영복 씨는 다름에 주목하면 부분만 보게 된다고 하셨지만)

 저자의 견해를 요약하자면, 그릇이란 용도가 정해져서 통용될 수 없는 특정 기능의 소유자로서, 막스 베버의 해석과 같이 전문화에 대한 거부라고 해석을 한다.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에서 이 구절을 부정적으로 언급하면서 동양 사회에서 전문성에 대한 거부로 인한 낙후 원인으로 말한다. 이에 대해서 저자는 오히려 자본가는 전문성을 추구하지 않고 여러 가지 분야에서 활약을 한다고 말한다. 전문화는 노예 신분에게 요구되는 직업윤리로서 수레바퀴를 전문적으로 만들고, 마차를 전문적으로 만다는 것으로 말한다. 또한 동서양을 막론하고 귀족들은 고전, 역사, 철학, 이성 등을 다방면으로 함양했으며 전문성은 노동생산성과 관련된 자본의 논리임을 말한다.

 그런데, 전문성을 현대에도 노동 생산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현대에서 노동 생산성은 이미 기계들로 교체되었다. 미래에는 더욱 대체될 것이다. 현대에서 전문성은 단순 노동 생산성이라기보다는 그 분야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다른 분야를 아울러 발전시킬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하는 것이 더욱 옳다고 생각한다. 전문성을 이렇게 해석한다면 저자와 베버의 견해는 다시 생각해볼 만하다.

 깊게 보면 한 곳에만 갇히지 않고 다방면을 볼 수 있는 사람을 군자라고 칭한다는 점에서 같은 견해이다. 그러나 전문가라는 ‘부분’에 대해서 다방면을 보는 것과 동시에 그 다방면에서 유용한 정보들을 가져올 수 있는 역량을 전문성이라고 정의하고 싶다는 것이다.     


 아름다움에 관한 부분에서도 새로운 것을 알게 되었다. 첫째로, 한자 아름다울 미는 양 양과 큰 대자의 회의자로서 양이 큰 것이 곧 아름다움이라는 것인데 고대에 생활에 유익한 양을 보며 그것이 무럭무럭 자라는 것을 볼 때의 마음을 곧 아름다움이라고 정의한 것이다. 둘째로는, 아름다움이란 우리말의 반대말이 ‘모름 다움’으로 오래되고, 잘 아는 것이 아름답다는 의미라고 한다.

 여기에서 저자는 상품 미학은 변화 그 자체에 탐닉하며 ‘모름다움’을 미의 본질로 만들어버렸다며 비판했다. 처음에는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이 미의 범위를 확장시키며 오히려 좋은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 비판에 대한 근거를 들어주시지 않아서 아쉬웠는데, 뒷부분인 옹야편의 내용과 형식을 말하는 부분에서 언급해주셨다.

 옹야편에 따르면 ‘바탕이 문채보다 승하면 거칠고 문채가 바탕보다 승하면 사치스럽다. 형식과 내용이 고루 어울린 후라야 군자이다.’라고 표현한다. 여기서 저자가 든 예를 들으면 문장이 단번에 이해 간다. 예를 들어 광고 카피의 형식을 보면 감탄하지만 누구도 내용을 신뢰하지는 않는다. 이런 경우를 사(史)하다고 한다. 반대로 사회운동 단체와 같은 도덕성과 정당성에 대한 자부심이 있는 단체에서 자부심이 지나쳐서 주장의 형식이 다듬어지지 않은 경우도 있다. 형식을 적절하게 다룸으로써 훨씬 더 감동을 줄 수 있음에도 격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야(野) 한 경우라고 한다.

 여기에서 상품 미학의 문제는 너무 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의 감성을 형식미와 그것의 변화에만 국한시키게 되는 것이다. 사용가치의 발달은 거의 없음에도 텅텅 비어버린 형식의 허위성에 농락당하는 소비자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주자는 이에 대해 사한 것보다 차라리 야한 것이 낫다고 하였다. 나도 만약 사와 야 중에서 하나를 택한다면 야(野) 한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한 때 스피치에 열풍이 분 적이 있었다. 지금도 그 기류가 흐르는 것 같다. 형식의 중요성 역시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잘 전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스피치를 배우고 싶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지식의 깊이가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내가 부족한 깊이를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법을 배워서 전달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특히 이런 점은 정치와 같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논의에서는 정말 악영향을 준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에서는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대중의 ‘인기투표’에서 승리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정말 깊이 숙고하여 좋은 체제를 만드는 것보다는 스스로를 알리고 뽑히게 만들기 위한 포장하기에 급급하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다 보면, 서로 말만 잘해서 자신의 논리만 예쁘게 포장하고 본질에는 나아가지 못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거친 껍데기에는 거의 다가오지 않고, 따라서 사를 택해서 껍데기에 윤을 낸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껍데기에 다가가 텅텅 빈 속을 바라보았을 때 얼마나 배신감을 느꼈는가?


 저자는 논어를 읽으면서 큰 줄기가 인간관계라고 생각한다. 여러 부분들에서 인간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동의하는 부분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었다.

 번지가 인에 관하여 물었을 때, 공자는 “인(仁)이란 애인(愛人)이다.” 지에 대해서는, “지(知)란 지인(知人)이다.” 논어에서 인에 관하여 공자는 다양한 대답들을 한다. 상황과 사람에 따라서 맞는 답변을 해준 것이다. 그런데 공통적으로 타인과의 관계가 들어간다. 지인에 관한 해석은 참 인상 깊다. "내가 그를 알기 위해서는 그가 나를 알고 있어야 한다." 서로 관계가 있고 사랑하고 있어야 진정 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자기를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에 나는 스스로 사람들에게 너무 쉽게 실망한다고 느꼈다. 어떤 사람이 내가 좋지 않다고 여기는 행동을 했을 때 그 사람을 단정 짓고 멀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내가 그 사람의 진실된 모습을 볼 수 있을 만큼 그 사람을 사랑한 적이 없다. 이 점에서 애정 없는 타자나 관계없는 대상에 대하여 알 수 있다는 환상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또, 이러한 인간관계에 대하여 논어가 해주는 조언은 좋은 사람이 좋아하고, 좋지 않은 사람들이 미워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이 맥락에서 사회는 사랑이 넘치는 곳이 아니라, 사랑과 증오가 함께 존재하는 미화하고 은폐해서는 안 되는 곳이란 것이다.

 

 논어를 읽으면서 지금의 우리 생활 속에서 고민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주제들이 있다는 것이 왜 아직까지도 논어가 동양 고전으로 자리 잡고 있는 지를 말해준다고 생각하였다. 저자가 논어와 공자에 대해 마무리를 하면서 언급했던 부분 중에 공자 개인이 사상으로서 중요하지 않고, 이것은 개인의 사상이 아닌 공자 사후의 제자들이 상당히 오랜 기간 공동 집필한 것으로서 개인에 중점을 두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유교라는 학문에 대하여 창시자로서 한 명의 영웅이 아닌 전체의 지식을 중시하는 태도는 어떤 일에서든지 전체의 노력보다는 한 명의 영웅을 만드려고 하는 우리 사회에서도 참 중요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며 책을 덮었다. 동시에 유교가 우리 사회에서 중시되면서 너무 비효율 적인 것들을 강요해왔다고 생각하며 비판적인 태도만 지니고 있었는데 <강의>를 읽으면서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며 꼭 제대로 논어를 읽어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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