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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 Nov 06. 2019

오늘도 경유중- 퇴사와 이직 사이

#1. 퇴사 후 영국행 그리고 교통사고

오늘도 경유중- 퇴사와 이직 사이

#1. 퇴사 후 영국행 그리고 교통사고


이병률 작가의 책 <혼자가 혼자에게>(달, 2019.9.19)는 이렇게 시작한다. "오래전 여행이 간절했던 시기에는, 한 번의 여행을 위해 오직 떠날 날만을 기다리면서 모든 일상을 여행에 맞춰 사는 그런 때도 있었다. 숨 쉬는 매 순간마다 떠날 날을 기다렸다면 믿을까. 하지만 이제는 여행에서 별다른 느낌 혹은 감흥을 얻지 못하고 돌아오는 경우도 있는데 그렇게 맥 빠진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스스로도 참 많이 놀란다. 그만큼 바싹 마른 상태, 결핍이 있는 상태에서 떠난 여행이 아니어서였겠지만, 그래도 그렇지, 어느만큼을 채워오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형편없어진 여행을 대하는 태도 앞에서 새삼 놀란다."


지금까지의 여행(비고: 퇴사 후 최소 1달 이상 거주형 여행을 일컬음, 근무 중 연차를 몰아붙인 10여 일 정도는 포함시키지 않겠음)은 지금의 내가 아니고 싶어서 떠나는, 내게 다른 일상을 주는 의식이었다. 반팔순 가까이 3대가 함께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내게 여행은 일종의 독립이기도 했다. 오롯이 나만을 위한 삶,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 말이다.


첫 번째는 영국이었다. 나를 둘러싼 환경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멀리 떠나는 것밖에 없었다.
업계는 좁았고 갑작스러운 퇴사와 이직이 불가능해 보였던 나는 학부 때부터 입에 달고 살았던 어학연수를 핑계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0개월 간의 도피는 행복과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애초의 계획은 런던에서 기차로 1시간 여 떨어진 바닷가 마을 브라이튼에서 3-6개월 정도 보내다 런던으로 옮겨와 뮤지컬 극장에서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해야지 싶었다. 당시에는 학생비자로 1주당 일할 수 있는 시간이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적지 않았다. 그게 아니면 에든버러 페스티벌 자원봉사를 지원해서 어떻게든 영국의 공연 현장에서 직접 경험을 쌓겠다는 포부도 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계획은 문자로만 남았다. 난 영국의 2층 버스에 치이는 교통사고를 당해 한국으로의 출국 때까지 목발을 짚고 다녀야 했고(지역신문에 나왔다'-'v), 헌신적으로 날 돌봐준 홈스테이 아줌마, 아저씨와 10개월을 풀로 함께 살며 브라이튼 토박이(;)가 되었다. 물론 목발을 짚고 에든버러의 울퉁불퉁한 돌바닥을 거침없이 쏘다니며 페스티벌을 즐겼고, 런던의 웨스트엔드 극장과 브라이튼의 클럽을 종횡무진하는 '목발 짚고 하이힐 신은 아시안 걸'로 활약했다.


10개월 내내 날이 흐리면 쑤시는 골반을 붙잡고 너구리 한 마리로 향수병을 달랬던 나는 한국에 돌아온 후 영국병에 걸리고 말았다. 언젠가는 영국으로 돌아가야지, 영국에서 살아야 하는데, 영국에서 외노자로 살아가는 방법은 무엇인가 고민하며 살았다. 물론 어학연수는 내게 놀라운 영어실력을 선물해주지 않았지만 놀라운 경험(2층 버스에 치여 구급차에 실려가고 입원하고 목발을 써야 했던 것은 가히 놀라운 경험인 것은 분명하다)을 하게 했고 덕분에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보다 현재에 집중하고 감사하고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내가 원했던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도 얻게 되었다.  즐겁고 성과에 대한 기쁨도 컸지만 몸도 마음도 너무 고되었다. 무엇보다도 거품만 가득한 업계와 미친듯한 업무시간과 강도(주 52시간 근무제는 그로부터 10년은 지나 이뤄졌고, 아마 그 당시는 주 100시간은 거뜬했었지 않았을까), 그리고 전혀 밝아 보이지 않은 미래로 일에 지쳐갔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2주 정도 영국에서 일을 해야 하는 프로젝트 제안이 왔다. 영국병은 여전했고 나는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주변을 정리하고 퇴사를 결심했다. 그러나 파운드 환율이 급격히 오르고 프로젝트가 무산됐다. 나의 영국행은 그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그리고 '영국이 나를 받아주지 않는다면 난 미국에 갈 거야'하며 괜히 욱하는 마음에 생뚱맞게 뉴욕행을 선포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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