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진 연인에게
어쩜 그날의 우리는 꿈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냥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음속의 먹먹함과 그를 떠올릴 때마다 드는 괴로운 기분과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이 그저 내 모든 착각이었더라면 나았을까. 분명 우리는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운 순간들을 나눴을 텐데 지금 내겐 부스러져버린 바랜 기억 조각들 뿐이다.
어색한 만남 속에 나눈 첫인사, 오며 가며 자꾸 마주치던 그의 눈빛, 친구들과의 모임에는 항상 그가 있었다. 나의 과거나 배경은 관심 없단 듯 묻지 않는 무심함, 스치던 그의 어깨, 가벼운 일상 이야기로 시작된 인사가 온 우주가 우리 둘만 가둬둔 듯 집중하게 만들던 대화들, 내게 집중하던 입술,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쓸어 올리던 손가락, 내 미소와 어색한 영어와 마른 어깨가 담긴 그의 눈동자. 작은 기적이 시작됐다고 생각했다.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건 그를 만난 지 한참 뒤에 알게 됐다. 내가 알지 못하는, 그날보다 앞선 날들 동안 그와 함께 했던 그녀를 난 우리가 헤어진 뒤에야 알게 됐다. 우리가 잠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난 뒤 떨어져 있어야 했던 그 여행이 그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어쩌면 그녀와 떠나기로 한 여행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정작 우리에게 가장 큰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그는 분명 나보다 훨씬 전에 우리에게 닥쳐올 어떤 문제들을 알고 있었고, 주변 친구들에게 내가 알게 될까 걱정을 했고, 내가 알게 됐을 땐 모른 척했다. 점점 믿음은 불신이 되고, 기적이라 믿었던 것들이 살며시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후로 우리는 이별의 날짜가 정해진 사람들처럼 사랑하기 위해 싸웠고, 헤어지기 위해 싸웠다. 마지막 금이 가면 깨질 우리가 너무도 아슬아슬했다. 이별할 우리가 안타까워서 싸웠고, 붙잡는 그를 밀어내기 위해 싸웠다. 왜 마지막 사랑을 그렇게 만들어야 했을까. 오랜 시간 뒤 그와 함께 있던 또 다른 그녀를 얼핏 보았을 때, 그 오래전 그녀와 그리고 나와 지금의 그녀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같은 존재였다. 그녀는 나였고, 나는 그녀였다.
꿈에서 깨면 그녀도, 나도 사라질 것이다. 그도, 그와의 기억도 사라져 버렸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