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언니에게 전화가 온다.
“얘, 정애야 나 요즘 할 일 없어 심심해 죽겠다. 너 어디 갈 때 나 좀 데려가라.”
“왜 오늘은 찜질방에 안 가셨어요?”
“새벽에 갔다 왔어. 할 일 없어 우울증 걸리겠다. 재미있는 곳 있으면 꼭 나 데려가라”
“네.”
그 언니는 거의 매일 찜질방에 다닌다.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분은 습관이 되어 하루라도 안 가면 몸이 쑤신단다.
전화를 끊고 쓰던 글을 완성하기 위해 컴퓨터 앞에 앉는다. 그 언니 말을 듣고 나의 일상을 생각해 본다. 아침에 일어나면 우선 잠자리에서 스탠드를 켜고 돋보기를 끼고 머리맡에 놓인 책을 펼친다. 요즈음 그리스인 조르바를 재미있게 읽고 있다. 젊었을 때처럼 빨리 읽히지 않아 천천히 읽기로 한다. 요즘은 슬로 리딩 하는 것이 좋다고 하는데 나는 슬로 리딩을 할 수밖에 없는 나이가 되었다. 어제저녁에 읽은 내용이 이튼 날 아침에 기억나질 않으니 자연히 슬로 리딩을 할 수밖에 없고. 슬로 리딩을 해도 또 반복 읽기를 해야 한다. 지금 내 머리맡에는 여러 권의 책이 있다. ‘그리스인 조르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괴테의 이태리 기행’ ‘토마스 만의 요셉과 그 형제들’ 모두 젊었을 때 지루해서 끝까지 읽지 못했던 책들이다. 그런데 요즘 읽으니 고개가 끄덕거려지고 이해되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 책 저 책 뒤적거리다 아침 식사 준비를 하고 남편이 나가면 집안 정리도 미룬 채 피아노 앞에 앉는다. 좋아하는 재즈 몇 곡을 치고 나면 어깨가 뻐근하다 그러면 그다음 글을 쓰려고 컴퓨터 앞에 앉는다. 글을 쓰다 궁금한 것이 나오면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 검색하면 쉽게 나의 부족함을 채울 수 있다. 글을 쓰다 말고 팝송 가사가 궁금하면 음원사이트를 둘러보고 악보가 필요하면 사이트 찾아 이리저리 다니고 단어가 궁금하면 국어사전 영어 사전을 헤매고 한자가 궁금하면 옥편을 찾아 나선다. 그러다 우연히 멋진 미술작품을 발견하면 그 그림을 그린 화가가 궁금하고 화가를 찾다 보면 미술사가 알고 싶고 그러다 보면 하루해가 저문다. 젊었을 때는 이리저리 바쁘다는 핑계로 이런 맛을 몰랐었다. 하루는 남편이 귀가할 때까지 집안 정리를 하지 못하고 침대 위에는 읽다 가 그대로 놓아둔 책 들이며, 쌓여있는 설거지를 그대로 놓아두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나를 보고 남편이 웃으며 말한다. ‘당신은 훌륭한 예술가야, 예술가의 기본은 지저분함이지.’ 그렇게 말해주는 남편이 고마워 얼른 일어나 대충 정리하고 저녁상을 차린다. 저녁 먹고 요즘은 남편이 설거지를 한다. 나이가 들면 시간이 빨리 간다더니 공부하고 싶은 것은 많은데 진도는 안 나가고 마음만 급하다. 60~75세까지가 학문과 예술의 깊이를 알 때라고 하신 김형석 교수님의 그 말씀에 공감이 간다. 나는 미술이고 음악이고 문학이고 깊이 있게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예술의 언저리에서 겉만 핥고 있어도 이토록 행복하니 말이다. 어릴 때 논두렁을 걸으며 노래하기를 좋아했고, 피아노가 치고 싶어 피아노 있는 집을 기웃거렸던 사랑스러운 나의 유년 시절이 그립다. 눈을 감고 내 안에 있는 순수했던 어린 나를 찾아 나선다. 전화했던 언니도 이런 맛을 알면 노년이 풍성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