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국물 요리가 생각나는 쌀쌀한 날씨다. 오늘의 메뉴는 따끈한 육개장으로 정한다.
먼저 북어, 무, 다시마, 멸치, 표고버섯 넣고 육수를 끓인다.
육개장 밑 국물을 만들기 위해서다. 잘 우러난 육수에 시래기, 우거지, 숙주 대파, 양파, 생강, 마늘 넣고 고추장, 된장, 참치액젖 약간 넣고 끓기 시작하면 얇게 썰어 놓은 샤부샤부용 소고기를(치아가 불편한 엄마를 위해 양지머리 대신 씹기 쉬운 샤브샤브용 고기를 넣는다) 넣고 모든 재료의 맛이 잘 어우러져지도록 푹 끓인다. 거기에 제일 중요한 마지막 소스인 감사하고 행복한 마음 한 스푼을 잊지 않는다.
여러 재료들이 어우러지면서 보글보글 맛있게 끓어오르는 국을 보고 있자니 가깝게 사는 아들네 가족이 생각난다. 미리 약속을 안 했기 때문에 전화를 할까 말까 망설인다. 주말이니 자기들 계획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맛있는 음식 같이 먹으며 손녀들 얼굴 보고 싶은 건 내 사정이고 아이들은 귀찮을 수 있으니 말이다. 오늘은 다행히 아이들이 선뜻 온다고 한다. 그 대답이 반갑다. 먹을 것이 흔한 때 태어난 요즘 아이들은 엄마의 이런 마음을 모를 것이다. 가족이 둘러앉아 같이 밥 먹는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시간인지 나이 들어가며 알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죽기 직전 후회하는 것이 소중한 사람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 소중한 사람에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지 못한 것이라 한다. 나는 요리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같이 먹을 사람이 없다면 무슨 재미로 요리를 하겠는가?
이제 아이들에게도 당당히 같이 맛있는 거 먹으며 좋은 시간 갖자고 말해야겠다. 언젠가 내손으로 요리하지 못하게 될 때 후회하지 않기 위해. 또 나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할머니로 살기 위해.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100세 노인’이란 제목의 책을 읽다가 문득 가족이 보고 싶은 때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큭 축복인지 새삼 느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아우슈 비츠에서 살아남아 작년에 101세로 세상을 떠난 유대인의 삶의 기록이다.
책을 읽는 내내 ‘이럴 수가, 이럴 수가’를 연발하다 어머니 얘기가 나올 때 눈물 한 바가지 쏟았다. 여러 곳의 수감시설을 거쳐 악명 높은 아우슈 비츄의 참상을 읽으면서 인간이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 집단 광기가 얼마나 무서운지, 인간이 존엄성을 잃어버리면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는지 소상히 보여준다. 동시에 극한의 상황에서도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이유를 알려준다. 저자의 가족에 대한 따뜻한 사랑, 친구와의 우정, 인간에 대한 존엄이 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다음은 내가 읽으며 밑줄 그었던 부분을 적어 보았다.
p93
요즘도 밤에 잠자리에 누워 과거를 돌이켜 볼 때면, 이때가 내 생애 최고의 시절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다락방에서 온 가족이 함께 지냈던 이 시기가 나에게는 너무나 소중하기만 하다. 비좁고 때로는 불편했으며 뼈 빠지게 일해서 입에 겨우 풀칠만 하고 살았지만 우리는 함께 있었다.
p105
작별인사도 하지 못한 채 사랑하는 어머니를 이렇게 떠나보냈다. 그리고 지금까지 평생 하루도 빠짐없이 어머니를 그리며 산다. 지금도 매일 밤 어머니 꿈을 꾸고 때로는 어머니를 외쳐 부르며 잠에서 깨어나곤 한다. 젊었을 때 내가 원하는 것은 어머니 곁으로 돌아가 함께 시간을 보내고 금요일 오후에 어머니가 만들어 주는 찰나 빵을 먹고 어머니가 웃는 모습을 보는 게 전부였다.
지금까지 살면서 어머니를 한 번만 더 볼 수 있다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기꺼이 내놓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보낸 날이 단 하루도 없다.
친구여,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오늘 당장 집으로 가서 어머니를 안아 드려라. 그러면서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해라.
p121
지금까지 살면서 알게 된 가장 중요한 깨달음은 바로 이것이다. 누군가의 사랑을 받는 것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가치라는 것이다.
우정이 없으면 인간은 길을 잃고 방황한다. 친구는 우리가 살아 있다는 걸 일깨워 주는 너무나 소중한 존재다. 좋은 친구 한 명이 있다는 것은 온 세상을 얻는 것과 같다. 사람의 영혼에 최고의 위안은 우정이다. 우정이 있었기에 나는 불가능한 생존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p128
그럴 때마다 내 목숨을 지켜주는 기술을 공부하게 해 준 아버지에게 말없이 감사드렸다. 아버지는 늘 일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일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세상에 기여하는 방법이며 사회가 제대로 돌아가도록 각자 제 역할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p145
살아남기 위해 사악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면 살아도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나는 단 한 번도 다른 수감자들을 아프게 한 일도 다른 사람 빵을 훔친 일도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동료를 도울 뿐이었다. 먹을 것이 충분하지 않다는 건 안다. 그래도 도덕성을 잃으면 치료약이 없다. 도덕성을 버리는 순간 모든 것을 잃는다.
p155
예전에 누리던 생활과 돈 가족 등 잃어버린 것을 한탄하며 시간을 보낸 사람들도 살아남지 못했다. 아우슈 비츄에는 과거도 미래도 없었다. 오직 생존만이 있을 뿐이었다.
p160
인간의 몸 같은 기계는 결코 만들지 못할 것이다. 지구상에서 만들어진 최고의 기계는 단연코 인간의 몸이다. 연료를 태워 생명을 유지하고 망가진 곳을 스스로 고치며 필요한 모든 일을 해낸다.
오늘날 젊은 사람들이 자기의 몸을 함부로 대하는 모습, 담배를 피워대고, 술을 퍼마시고, 마약을 하면서 우리가 선물로 받은 이 멋진 기계를 스스로 망가뜨리는 것을 보면 정말 가슴이 아프다.
p171
희망이야말로 인간의 몸에 힘을 주는 강력한 연료였다. 인간의 몸은 유사 이래 만들어진 어떤 기계보다 뛰어나지만 정신이 없다면 움직이지 못한다. 우리는 먹을 것 없이 몇 주 물 없이도 며칠은 생존할 수 있지만 희망이나 다른 인간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우리 몸은 결국에는 망가져서 무너져 내리고 만다. 내가 살아남은 것도 마음속에 희망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로를 돕는 마음 덕분에.
p186
우리가 힘을 낸다면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면 우리의 몸이 기적을 행할 수 있다는 걸 나는 잘 안다. 내일은 온다. 하지만 마음이 죽는다면 내일이 와도 우리는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지만 목숨이 붙어 있는 한 희망은 있다. 희망의 기회를 한번 줘보는 게 어떨까? 돈 한 푼 들지 않으니 말이다. 친구여 나는 이렇게 해서 살아남았다.
p209
사랑은 이 세상의 좋은 것을 한데 모아놓은 것과 같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서로 노력해야 하며 연민을 갖지 않으면 힘들지만
p216
고통에서 벗어나면서 내가 얻은 교훈은 이것이다. 행복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 행복은 우리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행복은 우리 내면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온다. 그리고 건강하고 행복하다면 내가 바로 백만장자와 같다.
p229
요리사인가? 그렇다면 당신이 만드는 요리가 이 세상에 엄청난 즐거움을 안겨주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하는 일은 중요하다. 당신은 맡은 일을 해내며 세상에 기여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 단신이 하는 일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