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 겁 없이 784페이지나 되는 책을 빌렸다. 제목은 ‘괴테 시 전집‘이다.
지난봄 괴테의 집이라 불리는 여백 서원에서 전 영애 교수님께 파우스트 강의를 들었다, 그 후 괴테에 관한 공부를 해보고 싶었다. 강의를 듣고 파우스트를 읽으니 어렵게만 느껴졌던 고전도 읽을만했다. 젊었을 때 지루하기만 했던 고전을 읽으며 가끔은 고개가 끄덕거려지는 희열을 느끼기도 한다. 이 번 연휴에 다시 한번 지적 허영심이 발동한다.
열심히 산 것 같은데 무언가 채워지지 않은 듯 마음 한쪽이 허전함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파우스트의 대사를 생각한다.
"아, 나는 철학도, 법학도, 의학도, 유감스럽게 신학까지도 죽을힘을 다해 공부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가련한 바보처럼 예전보다 나이진 것이 없구나."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라도 채워지지 않은 뭔가를 가지고 싶고, 이루고 싶은 인간의 헛된 욕망을 깨닫게 하는 대사이다. 매 순간 악마의 유혹에 휘둘리는 인간의 나약함을 알게 된다.
"멈춰라, 순간이여, 그대는 참으로 아름답다."
인간이 노력하는 이유는 아름다운 순간에 멈추기 위해서라고 한다.
끝없는 욕망을 멈출 수 있는 때를 아는 것이야말로 노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덕목이리다.
1700년대에 쓰인 책이 2000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아니 미래의 세대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보편성이 바로 고전의 힘이다.
괴테의 시 전집을 들춰본다. 우선 페이지가 나를 압도한다. 역시 어렵고 지루하다. 대문호의 두꺼운 시집을 빌린 것 자체가 무리이다. 하지만 두꺼운 책을 끼고 도서관을 나올 때의 뿌듯함도 나에게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파우스트를 읽은 저력으로 다시 한번 책장을 펼친다. 욕심부리지 말고 천천히 음미하며 읽기로 한다. 이제 나도 나이 들어 빨리 읽을 수도 없고 지루한 걸 참고 억지로 읽을 필요도 없다.
일곱 살에 쓴 시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평생 쉬지 않고 써 온 그 양의 방대함에 기가 죽는다. 이해할 수 없는 무거운 시는 그냥 넘기고 편하게 눈길이 가는 시에 내 마음을 얹는다. 역시 나에게는 사랑의 시가 최고다.
그중 마음에 남은 시 하나 적어본다.
괴테가 스위스 여행길에 사랑하는 여인 릴리를 생각하며 쓴 시이다.
산에서
만약 내가, 사랑하는 릴리여, 그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 광경이 내게 무슨 기쁨을 주랴!
또 만약 내가, 릴리여, 그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여기선들 찾으랴, 저기선들 찾으랴, 나의 행복을?
'인간은 지향하는 한 방황한다.'
는 파우스트의 명제에 위로받으며 나 이번 연휴 뜻 모를 784 페이지 속을 방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