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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니는 왕이고 며느리는 죄인인가요?

by 미나리





까불면 너네 아주 혼내줄 거야.


아들이고 딸이고 며느리고 봐주는 것 없어. 누가 못되게 구는지 다 지켜보고 있어. 나는 아주 공명정대한 사람이야. "



결혼 초, 시어머니는 이런 말씀을 종종 하셨다. 겁보였던 나는 잔뜩 쫄아 시어머니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남편도 집안의 실세는 엄마라고 말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시어머니 자존감이 좀 낮으신 것 같이 보여. 내가 열심히 띄워드려서 자존감 좀 높여드려야겠다. '

원래는 낯간지러운 얘기는 절대 못하는 성격이지만 일부러 좋은 말씀을 해드리려고 노력했다.


"어머님, 정말 아름다우세요!"

"어쩜 이렇게 너그러우세요!"

"대단하세요! 존경스러워요! "

어머니 자존감이 높아지면 우리 부부에 대한 간섭이나 나한테 마음 상해하시는 횟수도 좀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말이다. 하지만 기분 좋아하시는 건 잠깐이었고, 나에 대한 태도는 조금도 변하지 않으셨다.



결혼 후 맞는 나의 첫 생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며느리 생일을 챙기지 않는 시부모도 많다기에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있던 차에 시어머니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


"곧 네 생일이지? 요즘은 시어머니가 며느리가 마음에 들면 생일상 차려주고, 마음에 안 들면 안 차려 준다더라. 아직은 생일상을 차려줘야 할지 안 차려줘야 할지 모르겠네?"


어머니가 웃으며 말씀하셨다. 나도 바보처럼 같이 웃었다. 속으로는 또 마음이 상했다. 내가 언제 생일상 차려달라고 했나? 마치 본인이 나를 평가하고 그에 따른 상이나 벌을 내리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시어머니가 심판자, 권력자, 아니, 왕인가요?


내 생일 당일, 영광스럽게도 시어머니께서 생일상을 차려주셨다. 기분이 좋아야 하는 건지, 나빠야 하는 건지 헷갈렸다. 하지만 막상 어머니께서 정성스럽게 차려주신 생일상을 보니 마음이 살짝 녹아버리고 말았다. 전화로 그런 말만 안 하셨어도 알아서 감동받고 충성했을 텐데 시어머니는 왜 꼭 쓸데없는 말을 하실까? 축하를 받아야 하는 자리를 시험과 평가를 받는 자리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대체 어떤 생각과 마음에서 나오는 걸까? 며느리는 있는 그대로 사랑과 존중을 받을 수는 없는 존재인 걸까?



생일엔 그냥 축하만 받으면 안 될까요?




내 생일이 그렇게 끝나고, 곧이어 시어머니 생신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남편이 알려준 날짜를 달력에 적어놓고 처음 맞는 시어머니 생신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나 고민하던 차였다. 그때, 남편의 전화가 걸려왔다.


"어떡하지? 오늘이 엄마 생신이래."

"뭐라고? 무슨 소리야, 갑자기?"

"엄마한테 자기 생일도 모르냐고 전화 왔어. "

"당신이 알려준 날짜는 아직 안 됐는데? 당신은 엄마 생일도 몰라? "

"음력이라 헷갈렸어. 얼른 엄마한테 전화드려."


결혼 후 맞는 시어머니의 첫 생신인데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식인가. 황당하고 화도 났지만 어쨌든 내 잘못은 아니니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되겠지, 생각하고 시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어머니, 오늘 생신이셨는데 남편이 날짜를 잘못 알려줘서 제가 몰랐어요. 생신 축하드려요."

"넌 시어미 첫 생일도 까먹고 안 챙기니?"

"남편이 착각했나 봐요. 내년부터는 제가 잘 챙길게요."

"걔가 원래는 안 그랬는데, 너랑 결혼하고 나니까 이러는구나. 얼마나 네가 정신없게 만들었으면 그러니? 한 번도 내 생일을 안 챙긴 적이 없는 애인데. 너랑 결혼하고부터 나한테 바득바득 대드는 것도 그렇고. 네가 우리를 싫어하니까 얘가 그러는 거 아니겠니?"

"네? 아닌데요? 아무튼... 제 남편 때문에 어머님이 많이 서운하시겠어요."

"결혼을 했으니 부부는 하나야. 너도 같이 잘못한 거다. 너희 시아버지 알면 너희 둘 다 쫓겨난다. 일부러 얘기도 안 했어. 그런 줄 알아라."


어머니는 마치 아들의 잘못이 내 탓인 것 마냥 말씀하셨다. 며느리가 죄인인가? 내 잘못도 아닌 걸로 혼나고 나니 억울한 마음이 들어 분통이 터졌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들이 본인의 생일도 모르고 있다는 것에 얼마나 상처를 받으셨을지, 그리고 며느리에게는 또 얼마나 창피하셨을지, 어쩌면 그래서 자존심이 상해 며느리인 나한테 되려 화를 내셨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시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해 보려 했다.


"여보, 근데 결혼 전에는 어머니 생신 잘 챙겨드렸어?"

"응. 잘 챙겨드렸지."

"날짜도 모르면서 어떻게?"

"항상 아빠나 동생이 알려줬는데?"


이런 불효자식이 있나. 이래서 아들은 키워봤자 소용없다고 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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