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정체성이요?

자아정체성과 농정체성, 한국어와 한국수어

by 슈나

내 친구 정아의 모국어는 한국 수어다.

그리고 나의 수어 수준은 부끄럽기 짝이 없지만(아...진짜 초급 회화 수준) 정아와 만날때마다 소통하는데 어려움이 있던 적은 전혀 없다. (이건 모두 그녀 덕분)


내 수어가 부족하기 때문에 말하고 싶은 걸 표현할 수가 없어서 너무 답답하면 필담을 하기도 한다.

나는 습관적으로 수어를 하면서도 음성 언어를 같이 사용하는데, 정아가 찰떡같이 알아듣는 걸 보면 정아는 구어도 가능한 것 같긴 하지만 어느 정도 들을 수 있는지는 모른다. 물어보면 알려는 줄 것 같은데 어느'정도'라는 기준이 서로 다를테니까 말해도 뭐 모르겠지. 그래서인지 물어본 적도 없네...


인공와우 수술에 대해서는 다음 이야기에서 자세히 쓰려고 하는데, 이 수술을 받는다고 해서 바로 잘 듣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친구를 통해 알게되었다. 수술을 하고 난 후에는 꾸준하게 언어치료를 받으며 '듣기 위해' 끊임 없이 노력해야 하는데 그 와중에 수술 부작용은 물론이고 정신적으로도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한다.


정아는 중학교 때 인공와우 수술을 했다.

고등학교를 다닐때 쯤부터는 청인과 자신의 차이점을 느끼고 너무나 스트레스를 받았단다.

들으려고 노력하는 게 힘들고 말하는 게 무서웠으며, 이대로 사회에 나가봤자 루저가 될 것 같아서 졸업하기 전에 자살을 하겠다는 생각까지 했다고 했다.

그러다 어떤 공부방 선생님이 수어를 잘한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마침 배움에 대한 욕구도 많았던 시기라서 그 공부방을 찾아 갔다. 그런데 첫 수업이라고 하는 것이, 수학 과학이 아니라 '농 정체성'이었단다.


KakaoTalk_20210205_140800380.jpg


'자아정체성'과 같은 '농정체성'.

내가 누군지를 알고 나답게 살아가라는 내용.


공부를 하러 왔는데,

수어를 자신의 언어로 받아들이고 농인으로서 농인답게 살아가라는 소리를,

청인인 공부방 선생님에게 듣고 있자니,

너무 웃기고 화가 나서 그 공부방을 소개시켜 준 친구에게 따졌지만

그 선생님은 학교 선생님들과는 달리 수어를 너무 잘해서 그냥 공부방을 계속 다녔다고 한다.


내 똑똑이 친구는 선생님께 반론을 제시했는데,

제1 언어로 수어를 받아들인다면 여태 자신이 듣고 말하기 위해 해 왔던 노력을 어떻게 설명할 것이며

진정으로 행복하게 살고 있는 농인이 있다면 한번 데려와 보시라고 하니까,

선생님께서는 진짜로 본인의 세계관이 뚜렷하고 인생을 스스로 다스리며 살고 있는 멋진 농 선배를 데려오셨단다. 농 선배님의 인생 이야기를 들으며 그의 표정과 태도에 감명을 받은 정아는 자신의 언어가 수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타인이 아닌 자신만의 기준으로 행복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리고 자살하겠다는 생각을 멈출 수 있었다고 했다.




음성 언어 중심 사회에서 살아가야 하는 농인들은 그들이 사용할 수 있는 언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리를 듣기 위해 수술을 하고 소리에 대한 학습을 하도록 강요받는다.

TV에서 청각 장애를 가진 어린이의 언어 치료를 도와주는 대기업 프로그램을 홍보하는 광고를 본 적이 있는데, 마침 정아의 인공와우 수술 이야기를 알게 된 후라서 마음이 복잡했었다.


모든 언어가 그러하듯 수어에는 고유의 문법 체계가 있다.

한국수어는 한국어를 그대로 손동작으로 옮긴 게 아니라는 거다. 일례로, 한국 수어는 한국어에 있는 조사가 생략된다. 그러다보니 한국 수어가 모국어인 한국 농인들이 한국어로 글을 쓸 때 조사를 빠뜨리거나 한국어 문법 오류를 범하는 경우도 많은데, 그건 그 사람의 지능이 모자라서가 절대 아니다. 한국 청인들이 한국 수어로 말할 때도 수어 문법 오류를 범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외국에서 오래 살다 온 교포나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들이 어색한 한국어를 사용하면 귀엽다고 반응하면서, 수어가 모국어인 농인이 어색한 한국어를 사용하면 지능을 운운하는 것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keyword
이전 07화내 친구 이야기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