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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나 Nov 26. 2020

농정체성이요?

자아정체성과 농정체성, 한국어와 한국수어 

 내 친구 정아의 모국어는 한국 수어다.

그리고 나의 수어 수준은 부끄럽기 짝이 없지만(아...진짜 초급 회화 수준) 정아와 만날때마다 소통하는데 어려움이 있던 적은 전혀 없다. (이건 모두 그녀 덕분)


내 수어가 부족하기 때문에 말하고 싶은 걸 표현할 수가 없어서 너무 답답하면 필담을 하기도 한다.

나는 습관적으로 수어를 하면서도 음성 언어를 같이 사용하는데, 정아가 찰떡같이 알아듣는 걸 보면 정아는 구어도 가능한 것 같긴 하지만 어느 정도 들을 수 있는지는 모른다. 물어보면 알려는 줄 것 같은데 어느'정도'라는 기준이 서로 다를테니까 말해도 뭐 모르겠지. 그래서인지 물어본 적도 없네...


 인공와우 수술에 대해서는 다음 이야기에서 자세히 쓰려고 하는데, 이 수술을 받는다고 해서 바로 잘 듣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친구를 통해 알게되었다. 수술을 하고 난 후에는 꾸준하게 언어치료를 받으며 '듣기 위해' 끊임 없이 노력해야 하는데 그 와중에 수술 부작용은 물론이고 정신적으로도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한다.


 정아는 중학교 때 인공와우 수술을 했다. 

고등학교를 다닐때 쯤부터는 청인과 자신의 차이점을 느끼고 너무나 스트레스를 받았단다.

들으려고 노력하는 게 힘들고 말하는 게 무서웠으며, 이대로 사회에 나가봤자 루저가 될 것 같아서 졸업하기 전에 자살을 하겠다는 생각까지 했다고 했다.

그러다 어떤 공부방 선생님이 수어를 잘한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마침 배움에 대한 욕구도 많았던 시기라서 그 공부방을 찾아 갔다. 그런데 첫 수업이라고 하는 것이, 수학 과학이 아니라 '농 정체성'이었단다.



'자아정체성'과 같은 '농정체성'.

내가 누군지를 알고 나답게 살아가라는 내용.


공부를 하러 왔는데,

수어를 자신의 언어로 받아들이고 농인으로서 농인답게 살아가라는 소리를,

청인인 공부방 선생님에게 듣고 있자니,

너무 웃기고 화가 나서 그 공부방을 소개시켜 준 친구에게 따졌지만

그 선생님은 학교 선생님들과는 달리 수어를 너무 잘해서 그냥 공부방을 계속 다녔다고 한다. 


내 똑똑이 친구는 선생님께 반론을 제시했는데,

제1 언어로 수어를 받아들인다면 여태 자신이 듣고 말하기 위해 해 왔던 노력을 어떻게 설명할 것이며

진정으로 행복하게 살고 있는 농인이 있다면 한번 데려와 보시라고 하니까,

선생님께서는 진짜로 본인의 세계관이 뚜렷하고 인생을 스스로 다스리며 살고 있는 멋진 농 선배를 데려오셨단다. 농 선배님의 인생 이야기를 들으며 그의 표정과 태도에 감명을 받은 정아는 자신의 언어가 수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타인이 아닌 자신만의 기준으로 행복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리고 자살하겠다는 생각을 멈출 수 있었다고 했다.




 음성 언어 중심 사회에서 살아가야 하는 농인들은 그들이 사용할 수 있는 언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리를 듣기 위해 수술을 하고 소리에 대한 학습을 하도록 강요받는다. 

TV에서 청각 장애를 가진 어린이의 언어 치료를 도와주는 대기업 프로그램을 홍보하는 광고를 본 적이 있는데, 마침 정아의 인공와우 수술 이야기를 알게 된 후라서 마음이 복잡했었다.


 모든 언어가 그러하듯 수어에는 고유의 문법 체계가 있다.

한국수어는 한국어를 그대로 손동작으로 옮긴 게 아니라는 거다. 일례로, 한국 수어는 한국어에 있는 조사가 생략된다. 그러다보니 한국 수어가 모국어인 한국 농인들이 한국어로 글을 쓸 때 조사를 빠뜨리거나 한국어 문법 오류를 범하는 경우도 많은데, 그건 그 사람의 지능이 모자라서가 절대 아니다. 한국 청인들이 한국 수어로 말할 때도 수어 문법 오류를 범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외국에서 오래 살다 온 교포나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들이 어색한 한국어를 사용하면 귀엽다고 반응하면서, 수어가 모국어인 농인이 어색한 한국어를 사용하면 지능을 운운하는 것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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