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하나의 곡으로 모든 걸 채운 시네마천국의 사랑의 테마
https://youtu.be/7soF7lVzWgI?si=IMLuXnIMEmiOYgWw
오늘 오후도 그 여느 날과 별다를 것 없는 날이다.
학과수업을 마치고 늘 항상 기꺼이 오는, 와야 하는, 이곳에 왔다.
내 책상에 쌓여있는 제작일지와, 화이트보드에 적힌 빼곡한 일정이 오늘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곧장 두터운 방음문을 열고 스튜디오로 들어갔다.
" 호젓하게 창밖을 내다보고 싶네. "
그 여느 날처럼 음악을 틀지도 않고 곧장 창가에 몸을 기댄 채 턱을 괴었다.
늦은 오후, 따뜻하게 깊어진 노란빛조각들이 캠퍼스에 흩뿌려지고 있다. 한결 그윽해진 운동장을 가만하게 바라본다. 삼삼오오 어딘가로 열심히 발걸음을 재촉하는 모습, 서로 웃고 장난치는 소리, 농구공이 텅텅 튀기는 소리. 여느 날과 다를 바 없는 캠퍼스 속 일상의 소리들만이 나직하게 울려 퍼지고 있다.
내 안에 그 무엇이 소진된지도 모른 채 소진된 걸까? 조용히 내려앉는 기분이다.
여느 날 같지 않은 그 어느 날이다.
https://youtu.be/1HVsC9tkK-E?si=u_iBc5QBZXScMixq
그때였다.
똑. 똑. 똑.
“ 선배님, 우편물이 하나 왔어요. 한 번 보세요. “
“ 응? 무슨 우편물이지? “
군사우편이라는 우체국 소인이 찍혀 있다. 뜯어보니 Mix Tape 하나와, 편지 한 통이 들어있다.
‘ 안녕하세요. **학번 전자공학과 ***입니다. 사연과 함께 신청곡을 테이프에 녹음해서 보냅니다. 꼭 틀어주세요. ‘
군복무 중인 남학우가, 시각디자인과의 어느 여학우에게 띄우는 사연과 신청곡이었다.
난 재빠르게 편지를 읽어 내려가고 있다. 여러 마음들이 문장들에 담겨있고, 함께 추억하고 있는 음악일지 모를 신청곡을 그녀가 들을 수 있도록 틀어달라는 부탁의 편지다.
https://youtu.be/6lRqY7eu0BU?si=iHfd445KLD7BJe2s
신청곡은 영화 시네마천국의 Love Theme였다.
달그락달그락 믹스 테이프를 데크에 넣고 재생버튼을 눌러 그가 녹음한 음악을 듣는다.
‘ 혹시 다른 곡이나 멘트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
모르는 누군가의 마음을 풀어내듯 A면부터 B면 끝까지 재생했다.
하지만 단연코 그 한 곡뿐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가득 채워져 있던 단 하나의 곡.
그의 애절한 마음이 공명하는 기분이다.
" 시네마천국은 내 인생 최고의 영화야. 게다가 사랑의 테마라니.. "
일순간 모든 것이 정지된 것 같다.
대체 이런 순간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영화의 한 장면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어린시절의 선물 같은 순간이다.
수줍고 시린 마음에 가슴이 아팠지만, 정말 정말 로맨틱하다고 생각했다.
그 시절에 우린 모두 단 하나의 플레이리스트 앨범 제작자였다. 어릴 때부터 소중한 사람들의 소중한 날엔 믹스 테이프에 음악들과 피아노 한 두곡을 녹음해서 선물하곤 했었다. 받는 사람이 좋아할 만한 것으로, 또 들려주고 싶은 것으로 정성스럽게 선곡했다. 아날로그시절과 디지털시절을 모두 경험한 세대라면 누구나 공감되는 경험일 것이다.
그 ‘무제’ 앨범의 모든 트랙에는 남학우가 하나하나 녹음하며 오롯이 담아 채운 시간들이 담겨있었다. 지금처럼 손쉽게 Ctrl+V로 순식간에 붙여넣기 할 수 없는 효율을 따질 수 없는 절대시간이다. 사랑의 세레나데로 나열된 아름다운 시간의 크기 앞에 내 마음도 쌓이고 있었다.
그 Mix Tape를 들고 고민에 빠졌다. 틈날 때마다 그 신청곡을 틀고 싶어 졌기 때문이다.
왜냐면 방송 선곡규정 중 한 달 이내에 같은 곡을 두 번 이상 송출할 수 없는 규정이 있기 때문이었다.
회의시간에 국장에게 제안했다. 이번 건은 선곡규정을 지키지 말자고. 사실 그 누구 하나 뭐라고 할 사람이 없으리란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반대하더라도 설득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그렇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선곡규정이 아름답게 어긋났다.
https://youtu.be/6wjKu_bOuG8?si=pfZ1dmKC_ygvp2qh
원치 않았던 전공공부는 늘 뒷전이었다. 입학과 동시에 교내방송국 생활에서 낙을 찾기로 했다. 어렵더라도 끝까지 하겠노라고 스스로와 약속하며 시작했다. 하지만 맙소사. 그 다짐에 후회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대학 캠퍼스의 낭만은 온전히 남의 일이 되었고, 훈련과정은 고되고 힘들었다. 미팅도 밥 먹듯 할 줄 알았는데, 단체 과미팅 대타로 한번 해 본 것이 전부였으니.
당시 나는 강의시간에 제일 뒤에 앉아 Cue Sheet에 바쁘게 원고를 써 내려가던 말년 제작부장이었다. 함께 힘들게 정국원이 된 동기들 중 1/4만 남았고, 그 와중에 어학연수와 군복무로 생긴 빈자리까지 떠맡아 버겁게 책무를 다하고 있던 때였다. 하루 3개의 라디오방송 중 1-2개의 프로그램을 담당하던 때였으니 지칠 만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기획하고 글 쓰고 음악을 맘껏 듣고 고르는 이 생활의 즐거움은 감히 다른 것과 바꿀 수 없었다. 하물며 이것을 관두면 나에게, 내 꿈에 지는 것 같은 당시로선 억울한 감정이 서려있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소리 없이 지쳐가던 그때, 이 신청곡과 사연을 받은 것이다.
내 가슴속에서 꺼질 듯 말 듯 꺼지지 않은 작고 단단한 무언가가 다시 빛을 내며 피어오르고 있었다.
https://youtu.be/JuxK2uwOJ6A?si=SVFXvDliFSK2vckl
On Air!!
그렇게 틈을 만들어낸 시간 속으로 시네마천국의 Love Theme가 캠퍼스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하나의 앨범에 같은 곡이 계속 반복된 것처럼, 한 달여 동안 교내 모든 스피커를 통해 사랑의 테마가 쉴 새 없이 울려 퍼졌다. 학우들이 제일 많이 듣는 점심시간대에 집중해서 틀었고, 가끔은 볼륨을 줄이라는 항의 전화를 받기도 했다. 이 정도로 틀면, 그 여학우가 오며 가며 한 번쯤은 듣겠지. 그런 우연이 반복되면 혹시나 그를 떠올릴지도 몰라. 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Mix tape와 편지를 그 여학우에게 전달하면 어떨까? 라며 상상해 본 적도 있지만, 그 편지는 곡을 틀어달라는 부탁이었으니, 나는 그 뜻을 오롯이 존중하며 최선을 다해 음악을 틀 뿐이었다. 나는 그녀의 캠퍼스 시공간의 어느 우연 속으로 사랑의 테마 화살을 쉴 새 없이 쏘았던 큐피드였다. 그 테이프와 편지는 큐시트 보관함에 잘 넣어 두었다.
궁금하다.
캠퍼스에 흘렀던 그 음악을 그녀가 들었을까?
그래서 그에게 닿게 했을까?
두 분은 젊은 시절의 그 사랑을 가슴속에 아름답게 품고 계실까?
바람이 하나 있다.
당시 그 군복무 중이던 남학우 분이 어느 날 문득 옛 추억에 잠기면 좋겠다.
그러다 시네마천국의 러브테마를 툭툭 검색하시다가 이 글이 우연으로 닿으면 좋겠다.
난 당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신청곡을 틀었노라고.
이 이야기가 당신에게 다정한 따뜻함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지쳐 꺼져가던 내 마음에 소중한 빛의 씨앗을 심어줘서 고맙다고.
이 말을 꼭 전하고 싶었다고.
이렇게 약 20여 년이 더 지난 지금, 이 글을 발행함으로써 드디어 그 두 분의 사랑이야기에 지나가는 큐피드로 화답하는 마침표를 찍을 수 있게 되어 기쁘다. 비록 전달이 되지 못하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바를 이제, 비로소, 다 한 기분이다.
https://youtu.be/D3lYrJf9z-k?si=6w-s2tOOg3y3VYL8
지난여름 어느 날, 명필름 아트센터에서 엔니오 : 더 마에스트로 다큐멘터리를 감상했다.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악일대기가 인터뷰형식으로 담겨 있었다. 음악을 향한 순수함과 섬세함, 진지함과 노력을 끝까지 잃지 않았던 거장 엔니오 모리코네. 사슴처럼 크고 맑은 두 눈에서 그 모든 마음이 음악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말하고 있었다. 내게 영화와 음악에 대한 사랑의 시작엔 늘 시네마천국과 엔니오모리코네가 자리하고 있다.
중2 때부터였을까. 주말, 특별한 일이 아니면 보통 종각역에 내려 종로서적과 영풍문고를 들렀다. 대학시절엔 여러 자료들을 찾고 읽으며 라디오방송 인풋을 채워 넣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다녔다. 내 영혼과 만나는 편한 놀이터랄까. 조금 더 걸어 종로 3가 타워레코드도 가고, 광화문 교보문고도 함께 돌아가며 시간을 보냈다.
혹은 늘어지게 집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때론 학교 스튜디오로 가기도 했다. 주중 그렇게 아침 일찍부터 저녁까지 시달리는 곳에 굳이 또 주말까지 나오다니.. 나도 참 구제불능이었다.
홀로 앉아 듣고 싶은 CD와 LP를 산처럼 쌓아놓고 들으며 호사스러운 즐거움을 누렸다. 평소엔 엔지니어 차지인 믹서 앞에 앉아서 노브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사운드를 가지고 노는 것이 재밌었다. 지금도 믹싱 마스터링 플러그인에 관심이 많은 걸 보면 여전한 것 같다. 볼륨페이더를 올리고 내리며 곡과 곡사이를 타임 어긋나지 않게 연결해 보며 DJ처럼 곡제목도 중얼중얼 소개하며 놀았다. 내가 듣고 싶은 음악을 나한테 마음껏 들려주었다. 내가 혼자 하는 말을 혼자 듣는 것처럼.
그때 참 행복했다. 그 시절 내 낭만은 그것이었나 보다. 윤슬의 라디오로 플레이리스트 글을 쓰며 선곡하는 것이 내게 자연스럽고 금방 써지는 이유도 그 시절 덕분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큐시트 쓸 때처럼 누군가에게 얘기하듯 편하게 써 내려갔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시네마천국을 향한 2개의 오마쥬를 올리며 글을 마친다.
https://youtu.be/yLLu-ofs24U?si=thYMwqcZG6jMIJOE.
눈빛은 감출 순 있어도 속일 수는 없다고 했다. 토토의 눈빛을 보며 감동했었다. 스크린이 뿜는 사랑의 빛은 어린 토토와 어른토토의 눈빛 안에 영화에 대한, 알프레도 할아버지에 대한 진실한 사랑으로 담겨있다. 별처럼 영롱하게 반짝이면서 말이다.
상영관의 불빛이 토토의 눈동자와 얼굴에 스며든 마음은 한없이 맑기 그지없다.
토토는 영화를 보고 있지만, 우리는 토토라는 영화를, 시네마천국이라는 인생영화를 보고 있는 것이다.
영화를 보고 있는 토토의 눈빛과 얼굴빛을 순수하게 담고 싶었다. 시네마천국을 향한 내 마음에 비하면 한없이 모자란 표현이라 여전히 아쉽다. 거칠고 강한 피아노 터치도 거슬리고.. 일부러 리보이싱도 해 보고 다른 방향으로 많이 시도해 봤는데, 결국 처음에 들렸던 선율 그대로를 담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꿈속에서 선명하게 들었던 원형의 음들을 그대로 살려냈기에 스케치 원형에 매몰되었다 하더라도 순수함에 모든 의미가 담겼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후회는 없다.
https://youtu.be/8ggZx1zkHNk?si=RLKFAgSdB9IYX8EZ
가끔 보물처럼 꺼내보는 소중한 영상이다. 처음, 이 영상을 봤을 때 설레고 벅차서 절로 눈물이 났었다.
언젠가 꼭, 이 영상 속 마을에 가보려 한다.
오랜만에 꺼내봐도, 역시 여전히 좋다.
좋아서 참 좋다.
안녕,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
안녕, 토토
안녕, 그 편지 속의 두 남녀
안녕, 그 사연이 담긴 Cue Sheet
안녕, 사랑의 테마가 퍼진 캠퍼스
네, 그럼요.
하물며,
아랑곳없이,
아직도,
지금도,
여전히,
음악을 사랑하고
언제까지나 영원히 음악을 사랑할 겁니다.
전 음악 없인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에요.
이 글을 읽는 분들의 유년시절의 추억과 기억에는 무엇이 있나요?:)
※ 사진에 관한 저작물은 원게시자의 사전 동의하에, 라이센스가 승인된 서비스를 이용하여 업로드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