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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을 그립니다 미내 Oct 14. 2023

무례함에 관한 사적인 이야기

<개조심> 15.2x20.3cm_ sharppencil & watercolor on paper_ 2023_ 윤미내


누군가의 작은 친절함에 온종일 미소 짓는 날이 있는가 하면, 불쑥 들어온 무례함에 몇 날 며칠을 억울해하며 원통해하기도 한다. 모든 이가 내게 친절을 베풀며 다정한 언어로만 이야기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나온 세월 속에서 체득했음에도 무례함 앞에서는 예외 없이 마음이 무너진다.

서점에 가면 자신을 방어하는 방법에 관한 수많은 책이 있다. 책 속에는 무례함에 대처하는 여러 묘책이 적혀있고, 잘 기억해 두었다가 적용해 봐야겠다며 다짐하기도 한다.


성인이 되고부터 다소 방어적인 자세로 인간관계를 맺고 있다. 적극적으로 다양한 사람을 만나기보다는 나와 맞는지 시간을 가지고 살펴본 후, 어느 정도 교집합이 있는 사람과 관계를 유지한다. 인생의 경험을 통해 생기는 지혜 중의 하나가,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인간관계에서 내 성향에 맞지 않는 사람과의 경계를 어느 정도 인식한다는 점에서 지난날의 나보다는 분명히 더 지혜롭다고 생각한다. 대부분 사람들도 각자의 경험을 통해 인간관계의 한계를 인정하고, 물리적인 시간과 정신적인 소모를 피한 만남을 계획한다.

그러나 막상 무례함의 현장 속에서는 이 모든 게 속수무책이 돼버리곤 한다. 모질고 끈덕진 더위가 좀처럼 누그러들지 않는 여름날, 나는 무례함을 만났다.




내게는 일 년에 서너 번 정도, 만나서 근황을 나누며 저녁 한 끼 함께 하는 모임이 있다. 이 모임의 사람들은 편했고, 언제 만나도 서로를 응원하는 관계였다. 얼마나 반갑고 즐거울지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약속한 날, 우리는 만나서 저녁을 먹으며 그동안 서로의 생활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던 중에 그가 내게 말을 건넸다. 그는 조용한 목소리 톤을 가진 사람이다. 말하기보다는 듣는 경우가 많은 사람이었기에 그를 따르는 주변 사람들도 꽤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 그는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 같았고, 나를 향한 질문이 계속되었다.

내가 답변을 하면 그 답에 꼬리를 문 질문이 이어졌다. 질문은 모호했지만 집요했다. 그랬기에 내 대답도 막연하고 정확하지 못했다. 나의 예리하지 못한 대답을 알아차린 그는 다시 끈질기게 질문을 이어갔다. 과연 질문에 맞는 답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나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상황은 마치 면접 시 압박 질문의 분위기와 흡사했을 거라고 짐작해 본다. ‘이 사람한테 왜 이렇게까지 설명해야 하는 거지.’라는 물음에 도달했을 때는 갑자기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어떤 질문에도 날카롭게 대답하지 못한 나는, 그에게 무력하고 무지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이 들킬까 봐 부끄러웠다. 조리 있게 설명하지 못하고 궁지에 몰려, 결국 울음으로 상황을 종료시키려는 미성숙한 어린아이 모습 같아서.




모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택시를 탔다. 충분히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는 시간이었으나, 체력적으로 힘들었고 알 수 없는 허탈감이 들어 한 발자국 걷기도 귀찮은 마음이었다. 피곤한 마음에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집으로 가고 싶었는데, 기사님께서 여름휴가 계획을 물었다. 나는 얼마 전에 오키나와를 다녀왔다고 대답했다. 기사님은 예전에 일본을 자주 왕래하는 일을 했었다며 오키나와 이야기를 반가워했다. 그래서인지 일본의 지리와 문화에 박식하셨는데, 아쉽게도 아직 오키나와는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면서 내 이야기를 경청했다. 아무 말 없이 집에 오고 싶었던 마음은 넌지시 사라지고, 집까지 도착하는 30여 분간의 대화는 기대했던 모임의 자리보다 더 편안하고 좋게 느껴졌다.



집에 돌아와 쉽게 잠들지 못했다. 질문에 제대로 답변하지 못한 나에 대해 실망스러웠고, 울컥하기까지 한 모습이 부끄러워 서였다. 그런데 그때의 상황과 감정을 조금씩 정리할수록 내가 잠들지 못하는 까닭이 내 탓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나는 모임의 모두가 내게 무해한 존재이고, 즐거운 모임이 될 거라고 기대했다. 이 믿음은 나를 어느 정도 무장해제하게 했다. 만약 이것이 잘못이라면 앞으로 나는 더욱더 방어적인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특별한 상황을 제외하고, 어느 사람도 방어적인 태도를 갖추어야 할 모임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를 무기로, 진중함이라는 위장을 한 채,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내게, 솔직한 충고라는 명분을 내밀었다. 그리고 나는 나를 지켜낼 수 없는 질문 속에서 그의 충고를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어쩌면 솔직하다는 것은 무례함이라는 문 앞의 초인종이 아닐까. 벨을 누르고 문이 열리면, 결국 솔직과 무례는 한 발자국 차이일 뿐이다. 그는 기어코 문을 열고, 무장해제의 땅을 한 발짝 두 발짝 밟고 걸었다. 무례했고 폭력적이었다. 나는 그 상황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의 무례한 태도보다 내 부족함을 탓하며, 모임 안의 모두가 계속해서 내게 무해한 사람이길 바랐던 것이다.


그가 왜 내게 답이 모호한 질문을 계속했는지, 뭔가 못마땅한 것이 있었는지, 아니면 길고 긴 더위에 지쳐있던 건지. 나는 알 수 없다. 내가 그에게 왜 무장해제 했는지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무례함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그래서 당혹감과 충격이 남는다. 나이가 들며 경험치에 의한 세월의 지혜를 알아간다 한들, 무례함은 언제나 예측할 수 없고 만날 때마다 그 어이없음에 마음이 무너진다.




잠시 택시 기사님과의 대화를 떠올려 본다. 상대방보다 많은 경험이 있지만, 자신이 모르는 그 작은 부분에 질문하고 경청하는 모습이 편안한 대화를 만들었다. 이 겸손함이야말로 무례함을 치유하는 위대한 처방이다.


일상을 살아가며 나는 또다시 예상하지 못한 이에게, 예상치 못한 무례함을 겪을 것이다. 그리고 마음이 무너졌다가, 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할 테다. 또한 예상하지 못한 이에게,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예의와 겸손을 배울 것이다. 다만 후자의 예측불허 상황을 더 자주 만나기를 바랄 뿐이다.



※모든 이미지에는 저작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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