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일체의 경지를 지나오며.
며칠 동안 아이가 아팠다. 열이 39도 넘게 오르고 설사, 구토를 했다. 소아과에선 장염 같지만 파라 바이러스라는 열감기도 돌고 있으니 상황을 보자고 했다.
계획했던 일들을 다 접고 아이와 함께 집에만 머물렀다. 끈끈하다 못해 끈적하게 아이와 붙어 있으며 육아일체의 경지에 오른 듯한 며칠이었다.
거기다가 환절기 단골손님인 비염이 또 나를 찾아오는 바람에 그야말로 비염과 장염의 환장의 콜라보였던 나날이었다. 재채기를 하면서, 콧물을 줄줄 흘리면서 아이의 토사물을 닦아내고 옷을 빨았다. 죽을 데우고 보리차를 끓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그만큼 힘들지 않았다.
예전에도, 지금도, 나는 그다지 좋은 엄마가 아니었다. 아이보다 내가 중한 엄마였기에, 아이가 아프면 걱정을 하면서도 짜증이 앞서는 이기적인 엄마였다. 내 루틴이 깨지고, 내 시간이 줄고, 내 잠을 못 자는 것이 싫어서 짜증이 치밀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순도 100프로의 걱정으로 아이 곁을 묵묵히 지켰다.
무엇이 달라졌을까. 내면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아이가 그동안 기관에 가있는 동안 아이가 자신만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 대견하고 행복한 동시에 아쉽기도 했나보다. 제발 기관에 적응하라고, 나만의 시간을 가지겠다고 난리를 치던 나였는데 말이다.
아이가 다시 내 품에 쏙 안겨있고, 아이의 순간순간에 우리가 함께가 아닌 때가 없어지니 다시 아이와 하나의 우주 속에 함께 있는 기분이었다.
아이가 새근새근 내뱉는 호흡에 귀를 기울이고
아이가 오물오물 음식을 씹는 입에 집중하고
아이의 발그레한 얼굴의 열을 체크하며
아이의 순간순간은 곧, 나의 모든 순간이었다.
아이의 우주에서 긴급 신호를 보내, 잠시 나의 우주와 아이의 우주가 연결된 느낌.
그 긴급 신호가 끊어지면 다시 자신의 세계로 나아갈 것을 알았기에, 기꺼이 그 시간을 받아들인 것일게다.
아이는 이틀 열이 나고, 사흘 설사를 하더니 나흘째부터 다시 눈이 반짝이고, 쉴새없이 쫑알대고, 가만히 있지 못하는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전보다 한뼘 더 큰 듯한 모습이다. 나도, 어쩌면 한뼘 정도는 더 자랐는지도 모른다. 예상치 못한 이벤트가 벌어져도 어제보다는 덜 짜증내고, 아이를 더 걱정하고, 함께 하는 순간의 의미를 되짚을 줄 아는 엄마로 말이다.
오늘 아이는 다시 등원을 한다. 아이는 씩씩하게 자신의 세계로 나아갈 것이다. 나는 그런 아이의 뒤를 든든하게 지켜주는 역할로 다시 돌아간다.
너의 우주와 나의 우주가 다시 연결되는 날을 기다릴게. 다음엔 아프지말고, 행복한 일로 다시 함께 해. 사랑해, 그리고 엄마로 성장하게 해줘서 고마워, 우리 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