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에서 하원한 아이가 차에서 잠들어버렸다. 곤히 자는 아이를 깨울 수 없어 차에서 아이가 깰 때까지 1시간 정도 기다렸다. 참다 못해 아이를 깨워 집으로 들어갔는데, 아이는 자다 깨서 컨디션이 좋지 않았는지 엘리베이터에서부터 떼를 쓰기 시작한다.
집에 오자마자 “나 좀 달래주란 말이야. 안아줘!” 하면서 드러누워 떼를 쓰는 아이. 한번 뒤틀린 심사는 무슨 말을 해도 달래지지가 않는다는 것을 안다. 4년 반. 네가 살아온 시간 동안 너는 항상 그러했으니. 그런데, 네가 그러하듯 나 역시 이성의 뇌보다 감정의 뇌의 속도가 더 빠른 것을 어찌하리. 속에서 열불이 솟구친다. “일단 신발부터 벗자” 하고 이를 꽉 깨물고 이야기를 해보지만, 아이 귀에 그 말이 들어갈리 만무하다. 아이는 “일단 안아주라고~” 하면서 떼를 쓰고. 나는 계속 조건을 붙인다. 이거 하면 안아주겠다고. 진정하고 말 들으라고 다그치며.
항상 이런 패턴이다. 아이의 행동 이면에는 ‘부족한 잠, 피로, 배고픔 등’이라는 진짜 이유가 있고, 아이는 그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매번 “안아달라”고 한다. 안아주지 않으면 더 큰 소란을 키울 것이라는 듯한 말투로. 나는 그 시점에 항상 조건을 단다. 진정하면 안아줄게 등등. 아이가 말귀를 알아들을 만큼 큰 이후에는 ‘엄마도 진정할 시간이 필요해. 조금 기다려주면 안아줄게’라고도 이야기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항상 이런 상황이 반복되는 걸 알면서, 아이를 흔쾌히, 진정으로 안아주지 못하는 나란 엄마란.
그냥 안아주면 상황이 무마될텐데 왜 나는 아이를 안아주지 못할까. 어제는 점점 심해지는 아이의 징징거림이 너무 지쳐서 쇼파에 몸을 웅크리고 한참 동안 귀를 막고 있었다. 아이가 스스로 진정되길 바라면서.
내 안에 아직 자리 잡고 있는 내면 아이에게 말을 걸어 본다. 왜 그렇게, 힘든 거냐고.
글쎄... 기억 나는 한, 나는 꽤 화목한 가정에서 자랐다. 아빠가 일 하느라 바쁘셨고, 엄마도 가사에, 유난한 동생을 키우느라 정신이 없어서 나에게 특별히 신경을 써주시진 못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혼자서도 알아서 잘한다는 칭찬을 먹고 꿋꿋이 자라난 K-장녀로 컸다. 부모님이 특별히 정서적으로나, 학업적으로나 세심하게 챙겨주지 않아도 할 일을 혼자 뚝딱 해내는 장녀로. 그래야 했던 것 같다. 지금은 멋진 청년으로 자라준 남동생이지만, 한때는 허구헌 날 게임에 빠져 엄마와 갈등을 일으켰으니까. 컴퓨터 코드 자르고, 게임기 부수며 고성이 오가던 장면들, 엄마가 동네 PC방 여러 곳을 뒤져 동생을 끌고 오던 모습 등. 나는, 알아서 잘 해야 했다. 나마저 엄마를 속상하게 할 수는 없었다는 마음이, 누군가에게 기대지 않고 의지 하지 않는 성격을 만들었던 것 같다.
힘든 순간마다 떼를 쓰며 안아달라고 징징대는 아이를 마주할 때마다, 내면 아이가 외치나보다. 너는 왜 그러냐고. 나는 알아서 해왔는데 너는 왜 매번 그러냐고. 5살 아이에게 가질 마음이라기엔 너무나 유치하지만 내 안의 아이가 계속 소리를 친다. 아이가 징징대고 떼를 쓸 때, 나는 허울 좋은 사회적 얼굴을 벗고, 내 감정의 민낯을 마주한다.
‘엄마의 화는 내리고, 아이의 자존감은 올리고‘라는 책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다른 사람을 비하하는 이유는 그 사람에 대한 권력을 쥐기 위함이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상처에 대한 보상이기도 하다. 모욕을 받았던 어린 시절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시도이기도 한것이다. 그러나 남을 비난할 때마다 어린 시절의 상처는 치유되지 않는다. 오히려 상처가 덧날 뿐이다. 아이를 비난하고 있다고 깨닫는 순간 죄책감에만 빠져있으면 안된다. 만일 잘못되었다는 걸 알게 되면 즉시 아이에게 사과해야 한다.
잘 자고 일어나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말간 얼굴로 엄마를 향해 웃음을 날리는 아이에게 물었다.
“어제처럼 화내고, 소리지르는데도 엄마가 좋아?“
아이는 당연하다는 듯, “응! 엄마가 좋아. 엄마는 예뻐”란다.
“엄마가 나중에 늙어서 안 예뻐지면 엄마 안 좋아할거야?” 물으니
“엄마가 예쁜 모습만 뽑아서 마음 속에 넣어둘거야. 그러면 되지” 라고 대답하는 아이.
우문현답이 따로 없다. 진정으로 아이를 안아주고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 사과했다. 안아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엄마가 잘못했다고.
상처 받은 내면 아이가 충분히 슬퍼했다면 다음 단계로 넘어갑니다. 내면아이의 내면 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기존의 내면 부모는 내 부모였다면, 새로운 내면 부모는 나 자신입니다. 성인이 된 이상 미해결된 과제를 끝내기 위해 누군가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왜 나는 아이에게 매일 미안할까' 발췌
이제 다시 그 시간으로 돌아가, 드론을 띄운 것처럼 공중에서 나의 모습을 다시 본다. 혼자 웅크린 나 자신을 안아주고 싶다. 내 안에 있는 그 아이도 포근히 안아주고 싶다. 부모님도 너를 사랑했지만, 표현을 못했을 뿐이라고, 이제 내가 너를 안아주겠다고. 내 안의 그 아이가 평온할 때, 비로소 내 아이를 다시 안아줄 수 있을 것 이다. 아이를 키우며 내 안의 또다른 아이도 키워낸다. 내안의 그 아이도 비로소 행복해지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