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써야겠다.’는 마음이 휘발되기 전에, 그 마음을 그러모아 노트북을 챙겨들고 동네 카페로 향했다. 엄마 서넛이 여기 저기 돌탑처럼 뭉쳐있다. 어쩌면 정말 돌탑일지도 모르겠다. 아이가 공부를 잘했으면, 좋은 정보를 얻었으면 하는 마음이 하나씩 둘씩 모여 쌓인 돌탑들. 그리고, 거기에 속하지 못할까봐 안절 부절하며 여러 모임에 기웃 기웃댔던 나 역시 그 돌탑들 중 하나였다.
아이가 기관 생활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엄마들 모임이 시작되었다. 어린이집, 유치원, 학교를 기반으로 한 모임들. 같은 기관을 보낸다는 것은, 교육관이 비슷하다는 방증이기도 하고 동네에 살아서 자주 마주칠 수 있다는 점에서 교집합이 많았다. 그런 모임을 통해 만난 일부 어머님들과는 아이들 이야기보다 ‘우리‘ 이야기를 나눌 만큼 친밀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엄마들 모임은 그 생명이 참으로 짧고, 모임의 성격이 제한적이다. 기관/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부터 학습/육아/재테크 정보 등을 둘러싼 체면치레용 웃음과 말들. 그런 모임에 다녀오면 왠지 잘 안받는 음식을 먹고 난 것처럼 입이 썼다. 다른 아이는 중등 수학한다는데, 현행 하고 있는 우리 아이를 보면 괜히 조급해지고, 누구는 영재원 준비한다는데 지금 하고 있는 것도 제대로 못하고 있는 우리 애를 보면 괜히 짜증이 나고 잔소리를 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학업에 대한 소임을 완전히 내려놓으면 아이 뿐 아니라 엄마 성적표도 낙제 점수를 받는 것 같은 불안한 마음에, 이런 저런 커피, 브런치 모임을 기웃댔다. 나만 소외될까봐. 우리 아이만 뒤처질까봐. 그리고 모임 이후 뒷맛이 개운치 않은 느낌의 반복.
나만 이런 걸까. 하는 마음을 억누르며 엄마들 모임에 출석 체크를 하던 어느 순간,
오소희 작가님의 ’엄마의 20년‘이라는 책에서 그 불편함의 이유를 찾아낼 수 있었다.
작가님은 엄마들이 ’나‘를 잃고 살면서도 적극적으로 나를 찾지 못하는 이유를 크게 두가지로 정리한다.
남성 중심적인 사회. 그리고 입시 중심적인 사회.
남성 중심 사회는 직장맘들의 출산과 육아를 조직적으로 방해했어요. 직장을 가진 많은 여성들이 엄마가 되면 커리어를 포기하는 수순을 밟아야 했습니다. 커리어를 포기하는 순간, 사회는 기다렸다는 듯 ’경단녀‘라는 이름으로 그녀들을 가정에 박제시켰지요.
남성 중심 사회가 여성들을 가정으로 돌려보내면, 입시 중심 사회가 그녀들을 배턴 터치했어요. 경단녀의 끊어진 ’진짜 사회생활‘을 ’가짜 사회생활‘로 대체해주는 역할이지요. 아이의 사회생활이 엄마의 사회생활이라는 착각을 심어주는 방식으로.
그렇게 입시라는 새로운 미션을 부여받은 엄마들은 아이를 들쳐 업고 교육 전투장으로 들어선다고 하며 덧붙인다.
한 사회가 여성을 무시하고 모성만 강조할 때, 그 사회의 여성 인력은 결국 자신의 성취감을 모성 속에서 찾아낼 수 밖에 없다.
그리하여 엄마는 오늘도 각종 모임에 기웃대고, 거기서 얻은 학원 정보로 불안감을 소거하며, 아이의 학업을 관리하는 학습 매니저 역할을 자처하고 있는 것이다.
왜 엄마, 특히 전업맘으로 성공한 삶은, 아이를 서울대에 보내거나, 재테크를 잘해서 큰 돈을 굴리거나, 살림을 끝내주게 잘 해야 하는 것일까. 경제력이 없다면 교육력, 재테크력, 살림력이라도 있어야 입증할 수 있는 존재일까. 엄마력이라는 말은 왜 없을까 라는 질문에 이제야 답을 찾았다.
엄마력은 결국 자기력이다. 내가 자신으로 당당하게 설수 있을 때 결국 엄마로서도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엄마 본연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아이도 본연의 모습을 찾아갈 수 있다.
생각해보면 내가 가장 나로서 충만하고 나 다울 때는 엄마들과 학원 이야기하는 시간이 아닌, 독서모임 이나 글쓰기 모임을 할 때였다. 나 답게 살아낸 순간들이 엄마로서도 잘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되어주었다.
아이에게도 아이만의 자기력을 존중해주겠다. 내가 독서모임이나 글쓰기 모임을 할때 비로소 나다워지듯, 아이도 자신만의 그런 시간을 찾을 수 있도록 기다려주려고 한다. 다른 아이와의 비교로 아이를 흔들지 않고 아이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겠다.
그리고, 엄마들 모임에 자주 나가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아직도 아이 학업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내려놓을 수는 없어서, ’자주‘라는 단서를 붙인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