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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빛달 Apr 22. 2022

매일 걸었더니 일어난 변화들.

책을 읽고, 밥을 먹고, 가족들과 함께 하는 순간들에, 어느 순간 네모난 물체가 끼어들었다. 그 네모난 물체는, 세상과 나를 연결 시켜 준다는 미명 하에 나를 지금 이 순간이 아닌 과거나 미래로 훌쩍 데려다 놓곤 하는 것이었다. 책을 읽으면서도 인증하기 급급하고, 밥을 먹으면서도 사진을 찍어 기록을 남기고, 가족들과 몸은 함께 있지만 마음은 다른 세계로 연결시키는 그것, 스마트폰. 어느덧 나는 그것의 주인이 아니라 그것에 예속된 것 같았다. 화면을 켜는 순간 나에게 몰아닥치는 활자와 영상들, 좋아요에 휩쓸려 내 몸은 끝없이 쇼파로 파묻혔고, 머리는 한없이 무거웠다.      


스마트폰 때문만은 아니었다. 요즘 이른 사춘기를 겪는 듯한 아이와 매일 실랑이를 벌이다 보니 마음 어딘가에 점점 구멍이 생기는 듯했다. 아이 역시 몸이 크는 속도를 마음이 따라잡지 못해 힘든 것을 머리로 이해는 하지만, 매일 같이 짜증과 떼와 울음으로 응수하는 아이를 바라보며 내 안의 구멍은 나날이 커져갔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에 사로잡혀, 생각이 나를 휘두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부질없는 생각들을 떨치고, 나를 다시 자유롭게 하기 위해 걷기 시작했다. 생각이 아닌 몸에 관심을 돌리기. 그리고 시시각각 바뀌는 풍경들에 마음을 쏟기.      


지나치는 풍경들 속에 한 걸음 한 걸음 나를 던지다 보면 어느 순간 내 근심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걷고 있는 나의 존재와 지저귀는 새들, 어느 순간 짙어진 이파리들, 매일 다른 공기의 질감이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걷는 순간마다 내 욕심과 미움과 짜증과 후회를 내려놓으며 나는 가벼워진다. 나라는 존재가 그저 그 풍경의 한 조각이 되어버리는 그 순간, 나는 다시 나를 찾을 기운을 낸다.      




코로나로 아이들을 기관에 보내지 못한 기간 동안, 숨을 쉬기 힘들 만큼 하루의 무게가 무겁게 느껴지는 날이 잦았다. 나는 매일 소리 질렀고, 그런 내가 싫어서 후회했지만 그 다음날 또 그 패턴을 반복하고 있었다. 더 이상 내 자신을 못견디겠을 때, 새벽에 홀로 일어나 요가 홈트레이닝을 했다. 깊은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고요한 가운데 부드럽게 요가(라기 보다는 스트레칭 수준이라고 쓴다)를 하다보면, 유달리 긴장과 불안이 높은 나를 누군가 쓰다듬어주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그렇게 날카롭고 까칠하지 않아도 된다고. 아둥바둥 모든걸 붙잡으려는 나를 탁 놓은 순간 누군가가 등을 쓸어주는 느낌. 그리고 그 사람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 그렇게 요가를 끝내고 사바사나, 시체 자세를 하는 동안 나는 종종 울었고, 매일 비워졌다. 채우기 보다 비우는 힘을 그때 알았다.      


그리고 요즘은 요가 대신 걷는다. 달라보이지만 어찌보면 같은 행위이다. 요가도, 걷는 것도 마음의 찌꺼기를 비우는 일이니까. 요가도 걷기도, 명상이다. 내가 없어져야 비로소 나로 존재할 수 있기에 오늘도 나는 걷는다.      


, 매일 걸었더니 일어난 변화는 몸무게가 새모이만큼 줄었고, 체력이 코딱지만큼 좋아졌다는 . 기미와 주근깨가  짙어졌고, 기름값이 조금 줄었다는 . 하지만 보이지 않는 마음의 구멍이 점차로 메워지고 있다는 .  정도의 변화라면, 매일 걸어볼만 하지 않은가.


내 비루한 언어로는 부족하여, 고미숙 작가님의 글을 발췌하며 마무리한다.      

직립과 보행은 동의어다. 고로, 삶은 걷는 것에서 시작한다. 아침에 눈을 뜨면 일단 일어선다. 그리고 걷는다. 걷기 위해서는 집을 나와야 한다. 그래야 걸을 수 있다. 자동차건 지하철이건 비행기건 다 걷기 위한 수단이다. 삶이란 무엇인가? 내가 오늘 내딛은 수많은 걸음들이다.

그리고 한걸음씩 걸을때마다 온 우주가 출렁인다. 나의 몸, 나의 발만이 아니라, 내 안의 미생물과 세균들, 오장육부, 온갖 상념들, 무의식의 흐름 등등 모든 것이 함께 움직인다. 벚꽃이 흐드러진 남산을 산책하면서 내 신체는 다방면의 ‘케미’를 연출한다. 나의 생각과 꽃가루가 연접되고, 발걸음과 물소리가 공감각적으로 어우러진다. 초록의 빛깔에 반응하는 뇌신경, 폐를 활짝 열게 해주는 바람의 터치 등등. 온 우주가 나를 살리는데 기여하지만 동시에 나의 걸음이 온 우주를 출렁이게 한다. 그 ‘울림과 떨림’ 속에서 “천지만물이 내게로 와서 ‘나’로 살아간다”(정화스님).  - 고미숙, "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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