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주에는 주도성이 없으니까
*이 글은 2017년 서른넷 어느 여름에 작성한 것입니다.
외주자라는 말을 아무 생각 없이 쓰고 있다가 문득 ‘외주자’는 도대체 어떤 사람을 말하는 걸까 궁금해졌다. 나는 이 정도로 생각하고 있던 것 같다.
‘어떤 회사의 일을 그 회사 소속이 아닌 상태에서 받아서 하는 자.’
그런데 사전에서 ‘외주’를 찾고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 들었다.
[외주]
자기 회사에서 만들 수 없는 제품이나 부품 따위를 다른 회사에 맡겨 만들게 함.
또는 그런 일.
그동안 이 말에 대해서 철저히 내 관점으로 생각해왔다.
‘외外’라는 것은 ‘내內’가 있어야만 존재하는 것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내가 외주자라는 이유로 철저히 내가 일을 ‘받아서’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외주는 일을 안에서 밖으로 맡기는 개념인데 말이다.
이 정의에 의하면 외주자는 자기 회사에서 만들 수 없는 제품이나 부품 따위를 맡겨 만들게 하는 자다. 외주라는 말은 그 자체만으로도 배타적이다. 안과 밖, 울타리가 있음을 전제로 깔고 있으니까. 말 자체가 ‘우리 집에 왜 왔니’처럼, ‘너는 우리 안에 없다. 우리 밖에 있다.’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외주에는 주도성이 없다. 외주자 역시 주도성이 없다.
주도성을 가지려고 회사를 나온 건데, 외주자라는 타이틀은 내부에 있는 사람보다도 더 비주도적이다.
왜 나를 외주자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는지 확실히 알겠다. 이게 왜 중요하나 싶지만 내가 밖에 있느냐, 안에 있느냐는 중요하다. 나의 관점에서 나는 철저히 내 인생 속에 속한 내부자니까.
그런 의미에서 외주자보다는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