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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민아 Dec 02. 2020

10년 차의 고민: 올드해진 걸까, 스타일이 생긴 걸까


5년 차까지만 해도

이 일을 10년 정도 한 선배들이 부러웠고

한 업계에서 10년 정도 한 우물을 파면 

그때부터는 다 수월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나이를 먹고 역량이 올라가면

그에 맞게 자리도 변하고 역할도 변하고

기대하는 역량도 달라지고

책임질 게 많아진다는 것을 몰랐던 시절의 착각이다.


올해 2020년이 출판 편집자로 일한 지 딱 10년 차인데

난 8~10년 차일 때야말로 

아주 지독한 번아웃과 싸워야 했고

소명, 천직이라 믿고 있는 이 일을 

때려치워야 내가 살 것 같다고 느낄 만큼

내가 하는 일을 증오하는 시간도 있었다.


나는 프리랜서가 된 후로 꾸준히 일을 받아왔고

몇몇 책은 성과도 났으며 나름대로 프리랜서로서 안정적으로 정착한 케이스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지내다가는 내가 죽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너무나 괴로웠다.


그중 나를 괴롭혔던 한 가지 고민은 이것이었다.


올드해진 걸까, 스타일이 생긴 걸까?



갇힌 걸까, 나의 울타리가 생긴 걸까?





어느 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편집 작업을 하기 위해 모니터 앞에 앉았다. 

별생각이 없이 그렇게 몇 시간을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무의미한 소리들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탁. 타닥. 탁. 타닥.


타자 치는 소리. 마우스 클릭 소리.

그렇게 먼저 소리로 내가 하고 있는 행위를 자각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소름이 돋고 말았다.


내가 너무나 빠른 속도로 

아무런 고민 따위 없이 원고를 난도질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아주 많이 수정해야 하는 원고였다.

게다가 국내 자기계발서의 경우 

편집자가 원고에 관여하는 정도는 매우 높은 편이다.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잘 따져보면 다 나름대로 이유는 있었다.


여기서는 끊어서 부제를 넣어야지.

독자의 호흡상 여기서 끊어줘야 해.

이 문장은 강조를 하는 게 좋아. 

음, 이건 별도 페이지로 따로 만드는 게 좋겠어.


이런 작업들이 굉장히 무의식적으로 

아주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마치 편집 기계가 입력된 대로 일을 수행하듯이.


그때 나는 내가 굉장히 정형화된 편집을 하고 있단 생각을 했다.

그리고 스스로 가장 싫어하는 상태에 도달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고인 물이 되는 것. 
더 이상 변화하지 않고 정착하는 것.


더 미치겠는 건 

그 상태를 벗어나고 싶지만 

도저히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름 자칭 '방황전문가'로 살았던 터라

왠만한 내적 갈등이나 갈림길 앞에서 

선택을 하거나 결단을 내리는 게 크게 어렵지 않은 편이었는데도


이때만큼은 도무지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계속해서 기계적으로 일을 해나갔다. 

그러다 한 예술인이 나의 고민을 듣더니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예술도 똑같아요. 
당신에겐 스타일이 생긴 거네요. 
당신만의 '편집 언어'요.



그때 난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내 스타일이 생긴 거라고?

나만의 편집 스타일?


그럼, 그건 내가 그토록 바랐던 일 아닌가?


그러고 보니 어느 때부터 

내 동료들은 '이건 변민아가 편집한 책' 같다는 표현을 쓰곤 했다.

그건 나도 느꼈던 부분이었다.

내가 목차를 구성하면 어느 순간 뭔가 비슷한 느낌이 들곤 했다.

마치 '변민아표 목차'가 따로 있는 느낌?


그렇다면 고인 물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 스타일을 깨야 한다는 건데, 

스타일을 깬다는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스타일을 만드는 과정보다 그걸 깨는 것이 더 힘들다는 것을 느낀다.


사실 스타일이 생겼다는 건 올드해졌다는 것과 같은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아티스트, 크리에이터, 사업가 등등

누구나 늘 혁신을 하고 변화를 추구하지 않는가.

자신의 스타일을 깨뜨려가면서까지.

새로운 화풍을 접목하고, 새로운 양식을 접목하고, 완전 다른 섹터의 사업과 접목하고.


편집자도 다를 게 없었다.


그래서 그때부터는 

내 스타일이 아닌 것 같은 책들을 보려고 노력했다.

내 취향이건 아니건 요즘 사람들이 좋아하는 짤막한 글들을 읽었다.

그러면서 내 편집 언어의 어떤 게 촌스럽게 느껴지는지

어떤 부분이 올드하게 느껴지는지

스스로 판단해보곤 했다.


그렇게 '난 올드해졌고, 정형화되었고, 고인 물이 되었다'고 인정을 해버리니

오히려 돌파구가 보이는 것 같았다.

그 새로운 길이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내 마음이 열린 것만으로도

새로운 길을 향한 입구가 열린 셈이었다.


이런 기분은 아마 한 가지 일을 오래 한 사람,

그것도 꽤 열정적으로 일했고

그 일을 꽤 사랑했던 사람이 겪는 고통이라 생각한다.

변화하고 싶고 성장하고 싶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내가 멈춰 있는 게 싫어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리고 '지속성'을 갖기 위해선 반드시 건너야 하는 다리기도 하다.





https://blog.naver.com/eches84 

블로그에 포스팅한 글을 수정하고 보완하여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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