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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민아 Dec 04. 2020

나는 텍스트가 아닌 욕망을 편집하고 있습니다

10년 차 편집자가 현장에서 깨달은 '편집이란'

1.

처음으로 입사한 출판사에서 책 편집을 할 때만 해도 

뭐가 뭔지도 모른 채 되는 대로 일을 했다.

프로세스도 완전히 익히지 못한 상태였고

맞춤법도 거의 몰랐을 때이므로 

원고를 받으면 비문과 틀린 글자를 최대한 잡아내는 수준이었다. 


수준이 어느 정도였냐면 당시 내 별명이 '야한 여자'였다.


당시 한글프로그램에 '~해야한다'라고 붙여서 쓰면

빨간줄이 그어지지 않았다.

(지금 해보니 '해야한다'라고 치면 빨간줄이 생기지만

'써야한다'라고 쓰면 생기지 않는다)


아마 이걸 띄어 써야 한다는 걸 모르시는 분들도 꽤 많을 것이다.

실제로 원고를 받으면 붙여서 쓰는 분들이 많다.


나 역시 당시 모든 '~(아/어)야 한다'를 

습관적으로 붙여서 썼다.


- 글을 써야한다.* --> 써야 한다(ㅇ)

- 커피를 마셔야한다.* --> 마셔야 한다(ㅇ)

- 여행을 가야한다.* --> 가야 한다(ㅇ)


이렇게 '~야 한다'를 하도 붙여 쓰다 보니 

동료들이 "너무 야해"라고 놀리기 시작하면서

생긴 별명이다.


이 정도 수준이니 알 만하지 않겠는가.

오탈자를 잡는 작업만으로도 벅찼다. 


그때만 해도 나에게 편집은 

오탈자를 잡는 것, 문법적으로 잘못된 문장을 바로잡는 것이

(그것도 겨우겨우) 아니었을까 싶다.



2.

그러다 두 번째 출판사를 다니면서 

출판 시장에서 책의 '컨셉'이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컨셉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책의 제목인데,

독자들은 책을 주로 '표지'로 접한다.

그래서 표지는 일종의 광고판이기도 하다. 

그 표지를 어떻게 디자인하고 보여주느냐가 

책의 성패를 크게 좌우할 때가 많다. 


그때 나에게 편집은 

그 '컨셉'에 부합하는 원고의 구성과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돈을 모으는 방법'에 초점이 간 원고를 받았는데

이 책을 '습관'에 초점을 둔 책으로 컨셉을 잡게 되었다고 치자.


그러면 

목차 구성과 내용을

'습관'이란 키워드가 핵심이 되도록

독자 입장에서 이 책은 '습관을 만드는 책'이구나를 느낄 수 있도록

결을 바꾸는 것이다.


결이 정돈되지 않은 천을 생각하면 쉽다.

결을 정리한다는 것은

원고를 하나의 방향으로 쓱쓱 결을 정리해나가는 작업이다.

이렇게 정리를 해야 독자에게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더 명확하게 가닿을 수 있다. 


삶에도 일관성이 중요하듯 편집에도 일관성이 중요하다. 

그 일관성을 만들어내는 것이 컨셉이다.



3. 

성과가 나기 시작할 무렵,

즉 만든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타율이 높아질 무렵부터는 

좀더 '디테일'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가 독자 입장에서 텍스트를 소화해보는 것이었다.


그때부터는 '호흡'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다.


드라마에서도, 웹소설에서도, 웹툰에서도

꼭 절묘한 타이밍에서 끊어버려서

다음 화를 보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지 않나. 


누군가가 죽는 것 같은 장면을 보여주는데

정작 범인은 안 알려주고 끝나면 

다음 화를 보고 싶어 궁금한 마음에

결국 유료 결제를 하기도 한다.


그래서 부와 장 사이를

아주 절묘하게 끊는 데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그건 문장과 문장 사이, 문단과 문단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말 그대로 '행간'의 묘미를 조금 알게 된 것이다.


책은 글로 이루어져 있지만

글자의 배열로도 충분히 '휴지(쉬는 부분)'와 

저자의 감정을 드러낼 수 있다.  

그건 한국어에 띄어쓰기가 있기 때문에 더 가능하기도 하다.


어떤 부분은 독자가 빠른 호흡으로 읽어야 한다.

그런 곳은 문장을 짧게, 최대한 더 짧게 끊고 긴박하게 돌아가게끔 

편집을 한다. 


어떤 부분은 천천히 음미해야 한다.

그러면 그런 부분은 최대한 생각의 여지를 남기는 게 묘미다.

모든 걸 알려주면 오히려 맛이 떨어진다.


물론 이런 호흡은 나의 자의적 해석일 뿐이다.

편집자는 사람이고 개인이며

편집은 나름대로 크리에이티브함을 발휘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매우 사적인 작업이다.


다만 그 자의적 해석이 자칫 나만의 고집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

소위 '베스트셀러'를 아주 많이 읽었다.

독자들에게 많이 읽히는 데는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 베스트셀러가 가진 특유의 호흡을 모방해보기도 하고

내가 만드는 책에 접목시키는 작업을 했던 것이다.  


이처럼 텍스트 편집으로도 속도감을 만들어낼 수 있다. 



4. 

프리랜서가 되면서부터는

편집에 대한 개념이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텍스트 그 자체에서 벗어나

'사람' 중심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는 편집이란 일을 '광의'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어느 회사의 어느 직책을 달고 있는 편집자가 아닌

온전히 내 이름을 걸고서

일을 해나가야 했기 때문에

책 프로젝트에 얽힌 이해관계자와 구성원에 대해서

상당히 예민해져야 했다.


편집자는 원래

저자(때로는 대필 작가, 구성 작가, 일러스트 작가도 붙기도 하고),

심지어 저자의 지인들(아주 가까운 지인들은 생산 과정에 긴밀히 관여하는 일이 많고,

요즘에는 저자분들이 sns 친구들에게 의견을 물어보는 경우가 많다)

디자이너, 마케터, 영업자, 제작 담당자, 상사, 대표, 동료 등등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중심을 잡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모든 사람들의 의견이 절대

하나로 수렴되지 않기 때문이다.

각자가 추구하는 가치관, 방향성에 따라

아주 다른 이야기들이 오고간다.


주로 생기는 갈등은 

영업자는 '판매 실적(숫자)'을 더 중시하고

편집자는 콘텐츠를 더 중시하는 것.


그러다 보니 이런 일도 꽤 있다.

이 책은 사실 A컨셉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데

요즘 뜨는 컨셉이 A니까 그 책을 A에 관한 책처럼 보이도록 편집하는 일.


나는 이런 식으로 방향을 틀어야 하는 작업을

상당히 많이 했다. 


.


.


.


말은 쉽지.


실제로 저런 작업이 가장 힘들다.

말 그대로 '헬'이다.

그리고 어쨌든 저작권자는 저자다.

저작물이란 게 편집자가 맘대로 고칠 수 있는 게 아니다.


게다가 저자는 내 책이 콘텐츠도 탄탄했음 좋겠고

판매도 잘됐음 좋겠다고 생각한다.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건 언제나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편집자가 중심을 잡지 못하면

저자도 같이 흔들린다. 다 같이 불안해진다.

그리고 책은 점점 산으로 간다.


책에 관여한 자들의 감정과 욕망은 책에도 반드시 반영된다. 

그래서 좋은 감정을 유지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5. 

위와 같은 일은 출판사에서도 수없이 겪었으나

퇴사를 하고 나니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현재 편집 과정에는 꽤 세분화된 분업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나는 출판사 내부 인력이 하기 어려운 일을 해야 경쟁력이 있기 때문에 

그런 작업에 참여하는 일이 많았다.


세분화된 분업이라...

그 말은 얽힌 사람이 더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사람 중심으로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저 사람은 무엇을 원하는가.



일을 하다 보면 종종 이런 느낌을 받곤 한다.


마치 욕망의 줄이 여러 개 겹쳐져서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상황에

그 줄이 가장 많이 겹치는 한 지점을

알아내야 하는 게임을 하는 것 같은 느낌.


이 변화는 꽤 중요했는데,

단순히 표면적으로 보이는 욕망만 읽으면

반드시 문제가 터지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여유로워 보였던 저자는 알고 보니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여러 가지 악재가 겹친 바람에

얼른 책을 내서 자립을 하는 데 빨리 도움이 되길 바랐던 것이다.

이상하게 말하는 데 모순이 있고 조급해 보였는데

결국 이런 욕망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이런 욕망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면

편집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이 진짜 욕망이 발목을 잡거나

일을 진행하는 데 애로사항을 만든다.

자꾸만 조급해지니까.


그런데 이런 진실은 처음부터 알기 어렵다.

그런데 감정을 잘 관찰하다 보면 보이는 게 있다.

겉으론 아닌 척하지만

어색함이 느껴진다던가.

양가감정 때문에 말이 왔다 갔다 한다던가. 

(천천히 하더라도 좋은 책을 만들고 싶다 VS 빨리 해야 된다)


그런 미묘한 지점을 읽어내야 한다.

저자만이 아니라 얽혀 있는 사람들의 욕망 모두.


예를 들어 담당자는 회사의 대변자로서 나에게 피드백을 주지만

사실 그 회사의 대표님은 완전히 다른 욕망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 저자가 대표님의 친한 친구였기 때문에

어떤 무리한 요구라도 들어주고 싶었다던가)

그러면 잘못 읽은 욕망 때문에 중간에 일이 틀어진다. 


뿐만 아니라 예상 독자의 욕망도 읽어야 한다.

자기계발서의 구성은 솔루션 중심으로 생각하더라도 

표지에 들어가는 카피나 목차 문구 등은

욕망 중심으로 생각해야 더 매력적으로 다가가는 경우가 많다.


가장 좋은 카피는

'아, 이게 내 맘이었어! 어떻게 알았지?'
'맞다! 나 이거 궁금했었는데.'

바로 이 지점을 건드리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사람의 감정,

그것도 여러 감정의 레이어를 읽어내는 것이

프로젝트를 끝까지 끌고 가는 저력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요즘 '욕망'을 편집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이 다음에 
난 무엇을 편집하고 있을까. 




https://blog.naver.com/eches84 

블로그에 포스팅한 글을 수정하고 보완하여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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