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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민아 Dec 07. 2020

퇴사 후 지독한 번아웃은 '이날'부터 시작되었다


퇴사할 때 나는 프리랜서로 잘 정착하고 싶어

회사에서 기획했던 책 2종을 끌고 나와

회사 밖에서 마감을 하였다.


그렇게 했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편집자가 퇴사하면 저자가 타격을 받는다.

나 역시 그런 사례를 수없이 보았는데

내가 섭외한 저자분들께 그런 피해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둘째, 내가 기획을 한 책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면 그것만으로 민폐가 되기도 한다.  

아주 좋은 기획이라 하더라도

담당 편집자가 끝까지 책임지지 못하고 나오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긴다.

마땅한 담당자가 없거나 다들 기피하여 그 책이 붕 뜨는 일이 생기기도 하고

(그러다 몇 년 동안 출간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담당 편집자가 배정된다 해도 그 사람 입장에서는

뭔가 '잔반 처리' 같은 느낌이 들어

대부분은 기분이 상한 상태로 일을 하게 된다.

게다가 내가 저지른 일도 아니다 보니 주도성을 갖기 어렵기 때문에

마무리가 잘되기 어렵다.

분명 퇴사한 사람에 이어서 많은 일을 했는데도

'내 것 아닌 내 것 같은' 묘한 책이 된다.


기획자는 자기만의 어떤 그림을 갖고 접근을 했던 것인데

다음 사람에게 그 그림에 대해서 아무리 설명하고 위임한다 한들

인수받는 입장에서 그 그림까지 디테일하게 알기 어렵다.

그래서 첫 기획자가 의도했던 책과는 완전 다른 책이 나오기도 한다.

(그렇게 전화위복되어 더 잘되는 경우도 간혹 있으나 매우 드문 사례다)


이런 이유로 나는 기왕이면 내가 기획했던 책을

회사 밖에서 이어서 작업을 하고 싶었고

다행히 회사에서 허락을 해주어 퇴사 후에도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퇴사 후에도 전혀 쉴 틈이 없었다.

회사를 다니는 내내 과부하에 걸려 일을 했음에도

퇴사 후에도 바로 일을 이어서 했으니

제대로 쉰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때부터 이미 번아웃은 진행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내 상태가 매우 심각해졌음을 알게 되었다.


그날 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내가 편집한 책의 순위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Yes24 종합 5위 안에 들었다는 것을.

한마디로 베스트셀러가 되었단 뜻이다.


그런데. 웬걸.

.

.

.

.

.


기분이 좋지 않았다.

종합 5위 안에 드는 책을 만들었는데...

기분이 좋지 않다니.


이게 말이 되는가???


그런데, 진심으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이날부터

지독한 번아웃이 시작되었다.


그동안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정말 당황스러웠다.

기획한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는데, 기분이 나쁘다니? 도대체 왜?


그때부터 대혼란에 빠졌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의 '불문율'이 깨졌기 때문이다.


편집자들끼리는 농담으로 이런 말을 주고받곤 한다.




저자랑 멱살 잡고 싸워도
베스트셀러만 되면 돼.
책만 잘 나가면 다 풀려.


그렇다. 농담 같지만 사실이기도 하다.

아무리 저자와 편집자의 사이가 좋았어도 책이 너무 팔리지 않으면

그 관계가 지속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만드는 내내 갈등을 일으켰어도

책이 아주 잘되면 모든 고통과 안 좋았던 기억이 사라지고

돈독해지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책을 만드는 동안 아무리 괴로워도

나는 '판매가 잘되면 돼'라는 생각으로 달렸다.

잘되면 어차피 다 좋아질 거니까.


그건 편집자 인생에서 깨지지 않는 불문율이라 믿었다.


그런데.

.

.

.


책이 잘 나가는데 기분이 좋지 않은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그냥 그날 기분이 좀 안 좋은 거겠지.' 하고 넘겼다.


그러나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좀처럼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고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그 무렵 나를 지배하고 있던 주 감정은

무력감과 허무함이었던 것 같다.


책이 나가면 뭐하나.
어차피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나는 책을 만들다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
책 마감 하다 인생 마감하겠다 싶을 만큼
피 말리며 일했는데
저자는 그걸 알 리도 없고.
생색을 낼 필요도 없고.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행복하자고,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왜 나는 이렇게까지 괴로워하면서 일을 해야 하나.



이 생각의 고리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집에 있는 책을 다 불태우고 싶다는 욕망,

다시는 책을 펼치고 싶지도 않을 정도의 분노에 휩싸여 지내야 했다.


그때부터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은 한결같았다.



"그래서, 넥스트는 뭔데?"



나는 베스트셀러를 지속적으로 만들면

계속해서 보람을 느끼고 지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편집한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어도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가 되니

너무나 황당하고 서글펐다.


도대체 그럼 난 어디에서 보람을 느껴야 하지?

베스트셀러를 만들었어.

그건 그렇다 쳐.

그럼, 넥스트는 뭔데?

베스트셀러를 만드는 편집자, 그 넥스트는 뭐냐고?


왜 이런 사태가 벌어졌을까를 수없이 돌아보았다.

그러다 어느 날 이 모든 사태가

결국 나의 목표 설정이 잘못되었기 때문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출판사에 들어갈 때부터 목표를 이렇게 잡았었다.


"저 편집자한테는 어떤 원고를 맡겨도 기똥차게 만들어."란 평을 듣는 편집자

베스트셀러 제조기




성과를 내고 싶었고, 탁월해지고 싶었다.

누구보다 잘하고 싶었다.

그런 욕심은 1~5년 차까지 나에게 큰 동력이 되었고

아무리 과부하가 걸리고 야근을 해도 버틸 수 있는 근원이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상하다.

저게 진짜 편집자로서의 최종 목적지일까?

목표로서는 나쁘지 않았지만

목적으로서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럴싸한 목표를 정해놓고 달렸지만

내가 편집자로서 정말 이루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

심도 있게 고민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베스트셀러를 만드는 타율은 높아졌는데...

그다음은 뭐지?


그다음이 없었던 것이다.




퇴사 후 약 3년간 나는 이 질문만 던졌던 것 같다.


그래서 넥스트가 뭔데?



결국 그 답변을 찾았을까?

어느 정도는.

고비를 넘겼으니까

아직도 이 일을 하고 있지 않겠는가.


프리랜서가 되어 좋았던 것은

나의 밑바닥을 보게 되면서

진짜 나다움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그것을 실제 적용까지 하는 실험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베스트셀러에 집착하지는 않는다.

물론, 편집한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은 언제나 영광이다.

그러나 베스트셀러라는 것은 어차피 나 혼자 만드는 것이 절대 아니다.


너무나 많은 복합적인 요인들이 합쳐져서 탄생되는 것이므로

편집자인 내가 자랑한답시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닐 이유도 없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런 걸 떠벌리는 것 자체를 안 좋아하기도 한다.


그런 '결과'는

프리랜서로서, 외주자로서

평판을 만들고 몸값을 올리는 데 좋은 포트폴리오로 남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게다가 나는 독자 품으로 간 책에 대해서는

가타부타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때부터는 독자들이 그 책의 생명을 이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내가 고민해야 하는 부분은

편집한 책의 판매부수가 아닌

'편집자로서의 삶을 이어간다는 것은 무엇인가'여야 했다.



즉, 편집자로 산다는 건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했어야 했다.


그리고 이 질문은 왜 살아야 하는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와도 맞닿아 있었다.


책을 만든다는 건

작은 우주를 만드는 것과 같다.

아무리 그 책이 하찮게 보일지라도

누군가의 마음에 닿아 언젠가 꽃피울 씨앗이 되기도 한다.


그 책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냈는지

정량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유의미한 데이터가 없고

그것들을 산술적으로 평가할 지표가 없어서일 뿐.


그래서 그 한 권 한 권은 크다.

몇 권이 팔렸다 한들.


사실 그 '넥스트'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에디토리라는 팀을 만들기도 하였다.

그전에 여러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내가 해온 단행본 편집을 뛰어넘는 일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영역을 확장해나가면서

에디팅의 본질을 고민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래서 결국 넥스트는 무엇이었냐.
나답게 살기 위해 삶을 리셋하는 것이었다.



편집에도 내 스타일을 부여하고

라이프스타일도 내 스타일에 맞게 세팅하고

그렇게 삶 전체를 다시 세팅하는 것.

그래서 내 '찐 행복'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탐색하고

하루하루를 감사히 살아내는 것 말이다.


그리고 이 넥스트에 대한 탐색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https://blog.naver.com/eches84 

블로그에 포스팅한 글을 수정하고 보완하여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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