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17년 서른넷 어느 여름에 작성한 것입니다.
집에 덩그러니 큰 검은색 원 모양의 그림자가 보여
그게 무얼까 한참 생각했다.
그 바로 앞에 있는 작은 등이 모니터 빛을 만나 만들어낸 그림자다.
잘 보면 그림자는 원래 주인과 닮아 있으면서도 원 주인을 왜곡한다.
왜곡하는 수준이 과할 때도 있는데,
가장 답답한 건 실루엣이 아닌 진짜 모양이 어떻게 생겼는지 도저히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 그림자는 원 모양으로 원래 조명이 모습과 닮았다.
하지만 원래 조명이 갖고 있는 화려한 금색은 찾을 수 없다.
원래 조명이 갖고 있는, 위에서부터 샤프하게 떨어지는 곡선은 찾을 수 없다.
게다가 원래 조명보다 더 크기까지 하다.
내가 조명을 보기 전까지, 그 물건이 우리 집에서 계속해서 봤던 것임에도
저게 무얼까 생각할 만큼 낯선 건,
원래 조명과 사실 완전히 다르게 생겼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으니 내가 동그라미인지, 네모인지, 세모인지는 얼추 알 것 같다.
그런데 그 정확한 크기가 색깔에 대해서는 끝없이 고민하고
때로 잘못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그게 다 그림자처럼 살고 있어서 그렇다.
그림자는 빛에 의에 없어지기도 하고, 크기나 모양이 왜곡되기도 한다.
그래서 때로 나는 굉장히 크게 느껴지기도 하고, 때로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나의 본질과 진짜 크기는 정해져 있음에도 나를 자꾸만 다르게 인식하는 것이다.
크게 느껴지다 작게 느껴지면 상처를 받고,
작게 느껴졌다 크게 느껴지면 거만해진다.
빛, 즉 누군가가 주는 칭찬이나 잠깐 반짝하고 낸 어떤 성과 등에 의해
나의 크기를 키웠다가
누군가의 말, 행동, 잘 풀리지 않는 어떤 일 때문에 내 크기를 한없이 작게 만든다.
빛의 장난에 놀아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색이 정확히 뭔지 모르고 살아가다
문득 ‘금색’의 취향이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내가 나를 발견해준 것 같은 기쁨을 느낀다.
그렇게 하나씩 맞춰가다 보면, 정말 내가 어떻게 생겨먹은 사람인지 알게 되고,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빛이 만드는 그림자가 아니라,
빚을 통해 드러나는 진짜 내 모습을 볼 줄 아는 현명함을 갖고 싶은 것이다.
내가 꿈꾸는 내 모습이 아니라,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내 모습을 보아야만 한다.
거기에 무엇을 덧붙여주면 더 멋진 조명이 될지,
어디에 있어야 조명의 역할을 다할 수 있을지,
어디에 있어야 주변 가구들과 잘 어울릴지,
그 안에 꽂는 조명은 주광색이 좋을지, 형광색이 좋을지를 고민하는 게
건강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