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는 엄마의 마음이야.
오전 6시 30분, 알람소리에 일어나 세수하면서 잠을 깬다. 숨 돌릴 틈도 없이 부엌으로 향해 아이들이 먹을 아침거리를 준비한다. 오늘 메뉴는 큰 아이가 요청한 프렌치토스트다. 점심은 또 뭘 먹겠다고 했더라? 아 그래, 계란말이를 해달라고 했다. 둘째는 햄을 구워달라 했으니 스팸 몇 조각 잘라서 노릇하게 구워놓자. 아차, 어제 내가 밥을 했었나? 밥통을 확인하고 있는 찰나에 알람이 울린다. 오전 7시, 아이들을 깨워야 하는 시간이다. 학교 가기 싫다, 피곤하다는 아이들을 달래기도 하고 으름장도 놓으며 깨우다 보면 어느덧 출근해야 하는 시간이 된다.
나 : 얘들아, 엄마 다녀올게. 아침 차려둔 거 잘 챙겨 먹고 시간 맞춰서 등교 잘하고! 알았지? 냉장고에 계란말이랑 햄 구워둔 거 있고, 간식거리 챙겨뒀으니까 학교 다녀와서 배고프면 꺼내 먹어. 어디 나가지 말고 집에 안전하게 잘 있어야 해?! 아무나 문 함부로 열어주지 말고, 알았지?
1호 : 네~ 엄마, 걱정 마세요.
2호 : 응, 엄마~ 이따 봐!
처음 아이들만 두고 일을 하러 가던 날이 떠오른다. 어찌나 마음이 좋지 않던지, 일을 해야만 하는 경제적인 상황이 많이 원망스러웠다. 하던 일 그만두고 괜히 다른 일 해본다고 했나 싶고 말이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지만, 그 순간엔 정말 다 그만하고 싶었다. 아이들이 짠해서 말이다. 아이들만 집에 둔다는 것이 낯설고 불편하고 걱정스럽고 두려웠다.
그런데 며칠 두고 보니 아이들이 생각보다 잘 지내고 있었다. 엄마, 아빠 없이도 자기들끼리 얼마나 잘 지냈는지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기도 하고 말이다. 엄마 없으면 아무것도 못 먹고 있을까 봐 걱정했는데, 냉장고와 부엌 찬장을 깡그리 뒤져서 본인들이 먹고 싶거나 먹을 수 있는 것은 죄다 꺼내먹었더라. 12살과 9살, 아직도 어리게만 보였던 아이들이 언제 이렇게 컸나 싶게 훌쩍 자라 있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은데 그동안 내가 너무 일일이 다 챙겼나 싶기도 하고 말이다. 그렇게 보름 정도 지났을까, 이제 아이들은 본인들에게 필요한 것을 구체적으로 요청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엄마, 나 내일 아침은 토스트가 먹고 싶어.
엄마, 나는 스크램블 에그 해줘.
엄마, 냉장고에 음료수가 없어.
엄마, 우유가 없으니까 빵을 먹을 수가 없어.
엄마, 과자도 있으면 좋겠어. 간식으로 먹게.
엄마, 계란프라이 말고 계란말이 해주면 안 돼?
끊임없이 요구하는 엄마 이하 블라블라 요청은 그간 내가 아이들 곁에서 떨어지지 않게 챙겼던 것들이자 자주 해줬던 것들이다. 함께 있을 때는 아이들의 요청에 바로 피드백이 가능했는데, 이제 떨어져 있는 시간이 길다 보니 엄마 이하 블라블라 요청을 한꺼번에 저장해 둘 곳이 필요해졌다. 그곳이 바로 '냉장고'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간식과 음료수, 먹고 싶다고 했던 과자들을 모두 냉장고에 넣어두면 끝이다.
물론 아이들이 요청하는 것을 모두 다 들어주기는 어렵다. 어려운 요청은 이유를 설명하고 다음에 해주겠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당일 아침에 토스트를 해달라고 하거나 전날 미리 아침에 먹을 것을 준비해 두었는데 다음 날 아침에 갑자기 다른 것을 먹고 싶다고 하는 요청은 들어줄 수 없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특히 큰 아이가 이를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는데, 엄마가 너의 요청을 들어주기 싫어서가 아니라 '재료가 준비되지 않아서' 혹은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라는 이유를 계속 설명하니 아이들도 이제는 편하게 받아들인다. 아이들이 또 한 뼘 자랐구나 싶은 순간이다. 그리고 이제야 깨달았다. 아이들이 자란 만큼 요청사항의 형태도 업그레이드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라는 것을 말이다.
엄마, 계란이 이제 두 개 밖에 없던데, 계란을 사야 될 거 같아.
엄마, 떡볶이 떡 있던데 오늘 저녁은 떡볶이 해주면 안 돼?
엄마, 오늘도 계란찜이 먹고 싶은데 저녁 반찬으로 해주면 안 돼?
엄마, 나는 어제 먹고 남은 스팸 구워줘.
처음에 가졌던 짠한 마음은 이제 마음 한 구석으로 갈 만큼 작아졌다. 그동안 내가 주로 사용하던 냉장고를 아이들도 함께 사용하면서 엄마인 나와 아이들 사이의 소통창구가 하나 더 생긴 것 같아서 신기하다. 그리고 이렇게 잘 자라고 있는 아이들이 기특하고 대견하다. 물론 크고 작은 충돌도 발생하고 있지만, 아이들의 반항으로 인한 충돌은 엄마와 아이들 사이의 좋은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필요한 것이고 잘 해결한다면 나도 아이들도 성장하는 밑거름이 될 거라고 믿는다.
오늘도 아이들이 요청한 먹을거리를 아이들이 잘 보는 위치에 손에 닿는 곳에 채워둔다. 냉장고 안에 엄마의 마음을 채워둔다. 내일까지 신선하게, 아이들에게 잘 전달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