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정유정에 대해 더 이야기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낮에, 모처럼, 비밀독서단 녹화를 하고 왔다...
산책하듯 가서, 구경만 하고 온 느낌이라, 즐거웠다.
(시청률이 낮다는데, 곧 은희경, 김연수 특집이 방송되니까 좋아질 거야, 정숙 씨, 그렇지? 암, 그렇지!)
조승연은 여전히 박식하다. '여전히'라는 부사가 웃긴데... 나는 그가 신기하다.
많이 알고, 자신감이 넘치며, 어떤 상황에서도 적합한 언어를 찾아낸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하지만 그는 자신을 콤플렉스 덩어리라고 말했다.
나는 그가 (솔직히) 존경스럽다.
정유정의 소설 <28>을 정독했다. 예전엔 몰랐는데, 볼수록 굉장하다는 생각이 든다.
'전염병'은 그저 장치에 불과하다. 결국 인간은 인간을 죽인다. 참혹하게 죽인다. 인간이 고등 동물이기 때문에, 하등 동물이 동족을 죽이는 것보다 더더더, 잔인하게, 사소하게, 죽인다.
나는 인간으로 사는 것에 회의를 가진다. <28>은 희망에 관한 소설이다.
하지만 현실은 과연 희망적인가?
어떤 사람들은 왜 아직도 세월호를 거론하냐고 묻는다. 보상을 해주지 않았냐고 말한다.
생명 앞에 보상은 없다. 혹시 있다면, 정확한 이유를, 숱한 생명이 소멸해야 했던 이유를 밝히는 것이 아닐까.
소설가 정유정의 추천으로 빅터 플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었다.
빅터 플랭클은 유대인이다. 나치의 강제수용소, 즉, 아우슈비츠에 끌려갔다가 살아남은 심리학자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아들러의 개인심리학에 이은 정신요법 제3학파라 불리는 로고테라피 학파를 창시했다.
아우슈비츠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책이 <죽음의 수용소에서>다.
이 문장이 계속 머릿속에 남아 있다. 나는 '예스'라고 말할 수 없다. 복잡하다. 긍정은 인간을 살아나게 한다. 긍정은 언제나 옳을 것이다. 그렇지... 그래...
나는 정유정을 사랑하며, 존중한다. 우리 시대는 정유정을 갖고 있다. 그녀는 이야기의 마법사지만,
이야기보다 '중한 게' 그녀에게는 있다. 나는 그걸 알고, 그걸 믿는다.
<28>은 광주를 생각하게 한다. 1980년 광주. 내가 태어난 해. 내가 태어난 바로 그즈음.
드뷔시를 듣는다.
낮에는 졸려서 못 듣겠더니,
밤에는 졸려도 괜찮아서 듣는다.
다음 백과사전은 드뷔시를 이렇게 설명한다.
'인상주의 미술과 상징주의 문학 이념을 음악으로 표현했다.'
드뷔시는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가끔, 그 시절, 프랑스에서 태어났으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이우성
'20세기 상징주의 문학을 완성한 시인'
이라고 후대가 기록해줄까...
모처럼 김숙 누나를 만나서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