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겨울의 쓸쓸함을 찾아서
떠난 이유
처음으로 휴학을 했던 그 해 가을과 겨울은 유난히도 쓸쓸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도 없이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서 그런지, 나름 학교 밖의 사람들과 부딪혔을 때 세상 일이 쉽지 않다는 걸 처음 깨달아서 그런지, 한 해를 마무리해가는 시점에서 공허한 기분을 채워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비록 세상이 볼 품은 없어지지만 겨울에 어디론가 떠나는 것을 좋아하는 것도 마음이 비어있기에 그 어떤 새로운 풍경도 빈 틈을 쉽게 채워줄 수 있기 때문이다. 여름의 푸르른 계절은 볼거리를 많이 주지만 심적으로도 풍요로운 시기이기에, 스트레스는 해소될지언정 마음속에 무언가를 더 채워주기란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유독 겨울이 되면 녹이 없는 빈틈을 빌딩 숲과 화려한 불빛으로 채워주는 대도시보다는 소소한 볼거리가 있는 소도시로 떠나고 싶어 진다.
검푸르고 청량한 동해바다 대신 회색빛의 서해바다와 일제시대를 거쳐 사람들이 살아온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소도시 군산을 항상 가 보고 싶은 곳 1순위로 마음속에 두고 있었다. 그 와중에 겨울 중에서 가장 밝고 따뜻한 날인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서울에 사는 가장 친한 친구이자 친척인 사촌동생에게 어디론가 떠나자고 제안했다. 각자 떨어져 살면서 다시 만나기에 군산은 딱 적당한 거리에 있었다. 스물세 살 크리스마스의 군산 여행은 더할 나위 없었다.
가창오리 군무
부산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군산으로 향하면서, 눈 덮인 덕유산과 두 귀가 쫑긋한 마이산을 신기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지나갔다. 이제 자의적으로 어디론가 자유롭게 떠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지만 전라도로 향하는 길은 언제나 낯설고도 새롭다.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서울에서 내려온 사촌동생과 만나 가장 먼저 향한 곳은 금강 하구둑이었다. 겨울에 군산을 찾아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철새들의 군무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몇 해 전 가장 좋아하는 방송이었던 ‘1박 2일 군산 편’에서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가창오리 군무를 소개한 이후로 나에게도 저런 기회가 오기만을 항상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 하나 없는 금강 하구의 갈대숲은 크리스마스의 밝은 분위기를 피해 내려온 우리의 기분과 꼭 닮아있었고, 시내로 다시 돌아갈 방법은 생각하지 않은 채 무작정 새들이 모여있을 것 같은 강의 끄트머리를 향해 걸어갔다. 아직 강 끝에 채 닿지도 않았는데 우연히 새들과 만나게 되었다. 지금까지 들어왔던 벌의 윙윙 소리와는 차원이 다른 부우웅하는 소리가 순식간에 머리 위로 지나갔는데, 새들이 군무를 이미 끝냈는지 우리의 머리 위를 지나 떼를 지어 날아가고 있었다. 강 쪽으로 지는 노을과 함께 어둠 속으로 새들도 사라졌다. 도시의 크리스마스 불빛 대신 택한 자연의 경이로움을 황홀한 노을과 함께 보았기 때문인지, 군산은 차가운 공기와 함께 노을 속에서 군무를 추는 가창오리 떼를 볼 수 있는 최고의 겨울의 여행지라고 각인되었다.
밤이 되어 버스를 타고 군산 시내로 돌아와 예약해 둔 게스트하우스 도미토리에서 짐을 풀었다. 비록 원하던 일본식 가옥의 숙소는 아니었지만, 다락이 주는 아늑함에 차가운 바람을 맞았던 걸 녹이면서 몇 시간 전의 벅차올랐던 감정을 되새겨 보았다. 그 날 하루만으로도 무료했던 지금까지의 일상을 채워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 날의 우리는 비록 2층 침대가 3개 있는 방이라고 해도 낯선 곳에서 하룻밤을 보낼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숙소였다고 생각할 때였다. 지금은 낯선 사람이 나의 소중한 수면시간을 방해할 수도 있다는 걱정을 해가면서 2명 이상의 숙소가 부담스러워졌는데, 여행지에서 처음 만난 사람과도 스스럼없이 말을 트고 지냈던 그때가 신기하기도 하면서도 그리워지기도 한다.
군산의 매력
다음 날 군산 시내를 돌면서 히로쓰 가옥, 동국사 등 일제시대의 흔적들과 문학작품과 한국지리에서 익히 들어왔던 군산항 도선장의 뜬다리부두를 직접 보았다. (여행은 결국 현장체험학습이다.) 드라마에 나왔던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먹고 크리스마스라 그런지 유독 연인들만 보였던 경암동 철길마을에서 1박 2일 군산 여행의 여정을 마무리했다. 서해바다의 조수간만의 차를 이용한 항구의 기능이나, 그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는 일식가옥의 모습이 일제시대 또 하나의 거점도시이자 항구도시이면서 내가 살아왔던 부산의 모습과는 또 달랐다.
낮은 집들이 모여있는 시내는 가볍게 하루 정도 시간을 내어 돌아볼 수 있는 볼거리들로 가득 차 있었고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 나온 초원사진관을 12월의 크리스마스에 찾아온 미묘한 우연도 있었다. 쓸쓸하고 외롭고 마음이 공허해서, 크리스마스의 화려한 불빛을 피해 떠나온 도시였지만, 소도시 군산만이 주는 자연 속에서, 역사의 흔적 속에서 마음을 가득 채우고 돌아갈 수 있었던 잊지 못할 여행이었다. 그래서 겨울이면 생각나는 도시 중의 하나가 군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