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던 내가 머물기 시작했다

8장. 우리집에서 계절이 시작되고 나서부터

by 미나리즘
요즘은 또 어디 다녀오셨어요?


한때는 공항이 가장 설레는 장소였다.

여권을 품에 안고, 비행기 너머의 풍경을 바라보며 또 하나의 낯선 도시를 품을 준비를 하던 그 시간들. 여행의 모든 순간이 내겐 '살아 있음' 그 자체였다. 그 설렘을 오래도록 붙잡고 싶어 글을 썼고, 책을 냈고, 결국 '여행작가'라는 이름으로 살게 되었다. 길 위에서 머물고, 걷고 기록하며 존재를 증명하듯 그렇게 살아왔다.


4년 전, 우리 가족은 도시를 떠나 전원주택으로 이사했다.

처음부터 이 삶을 꿈꿨던 건 아니다. 그저 딸아이가 조금 더 편안하게 숨 쉴 수 있는 곳에서 살고 싶었다. 당시 우리가 살던 곳은 서울 강남, 논현동의 빌라였다. 유치원에서 집까지는 겨우 5분 거리였지만, 그 짧은 길을 걷는 동안에도 아이는 종종, 아니 자주 울음을 터뜨렸다. 굉음을 내며 지나가는 배달 오토바이 소리에 아이는 쉽게 놀랐고, 그럴 때마다 난 아이를 다독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때부터였다. 도시를 떠나야겠다고 마음 먹은 건...


서울을 떠나 곳곳을 오가며 집을 보러 다녔다. 마음에 드는 집은 아이 학교에서 너무 멀었고, 소위 '학세원'은 집값이 높았다. 조건에 맞는 집을 찾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렇게 두 달이 흐르고, 마침내 스무 번째로 본 집 앞에서 남편과 나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 집이라면 괜찮겠다는 확신이 들었고, 그 해 겨울 이 집으로 이사를 했다.


바랐던 대로 시끄러운 배달 오토바이는 사라졌지만, 그만큼 배달해 주는 음식점도 없어졌다. 생활은 다소 불편해졌지만, 그 불편함이 삶의 리듬을 바꾸어 놓았다. 떠나지 않아도, 눈앞에서 생겨나는 작은 변화들이 나를 들뜨게 하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여행지의 풍경보다 더 자주, 더 가까이에서 마주하게 된 자연의 속도에 조금씩 마음이 맞춰져 갔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 걸 느끼고, 햇살의 기울기로 하루를 가늠하고,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멍하니 바깥을 바라보는 일상이 점점 좋아졌다.


우리는 예전처럼 자주 떠나지 않는다


물론, 여전히 여행을 사랑한다. 구글 지도에 가고 싶은 곳 별표를 찍고, 멋진 풍경 사진을 보면 여전히 가슴이 두근거린다. 가보지 못한 풍경 앞에선 언젠나 눈이 반짝인다.


하지만 우리는 예전처럼 자주 떠나지 않는다. 대신 자주 바라본다. 마당의 나무를, 식탁에 둘러앉은 가족을, 창밖의 계절을... ‘떠나야만 의미가 있다'고 믿었던 시간들이 무색할 만큼, 머무는 일상이 점점 내 안에 자리를 잡아갔다. 어디든 떠나야 할 것 같던 불안은 사라지고, 오늘이라는 하루를 담담하게 마무리할 수 있게 되었다.


전원주택에서의 삶은 다소 불편하지만, 그래서 더 내밀하다. 불이 꺼진 마을, 깜깜한 밤하늘 아래 마당에 나가 서 있으면, 도시의 빛에 가려 미처 보지 못했던 별들이 선명히 빛난다. 그 별들 아래서 나는 다시, 작은 존재로 돌아간다. 내가 진짜 좋아하게 된 건 단지 집이라는 공간이 아니다. 그 안에서 흐르는 느긋하고 단단한 시간이었다. 나는 요즘, 떠남이 아닌 일상을 천천히 여행하는 중이다.


이전 07화나는 괜찮다고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