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결정한 숙소, 그날의 풍경
멈춤은 쉼이 되고,
망설임은 답이 되었다.
돌부리에 걸려 멈춘 걸음이 새로운 풍경을 보여주듯, 여행의 삐걱거림은 늘 또 다른 길을 열어준다. 촐폰아타에서의 몸살은 뜻밖의 쉼이 되었고, 숙소 선택 앞에서의 우유부단한 고민은 아이의 재치로 가장 현명하게 풀렸다. 길 위에서 우리가 배운 건 명확했다. 단점 없는 장점은 없다는 것. 멈춰 선 촐폰아타, 남들은 스쳐간 풍경에 불과할지 몰라도 우리에겐 오래도록 피어날 이야기로 남았다.
처음 키르기스스탄을 찾는 이들이 걷는 길은 대체로 비슷하다. 수도 비슈케크로 곧장 들어올 수도 있지만, 대개는 국경을 맞댄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시작해 키르기스스탄으로 넘어온다. 항공편이 많고, 항공료도 더 저렴하기 때문이다. 알마티에서 출발해 국경을 넘어 카라콜을 지나고, 이식쿨 호수를 따라 송쿨까지 둘러본 뒤 비슈케크로 빠져나오는 루트. 익숙하고 검증된 여정이다. 보통은 7~10일이면 충분하고, 여유를 부려도 2주면 넉넉하다고들 한다.
열 살 아이와 함께 걷는 여정이니만큼, 하루를 느슨하게 흘려보내기도 하고, 때로는 집 앞 골목을 탐험하듯 나서기도 할 것이다. 단지 오래만 머무는 데 그치지 않고, 더 깊이 살아보기 위해 3주라는 시간을 비워두었다. 그렇게 속도를 늦추자 풍경 너머,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해, 아이를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남편과 나, 우리 두 사람의 여행 속도는 원래가 느린 편이었다. 거기에 아이까지 함께하니 느리게 걸을 이유는 충분했다. 전 편에서 밝혔듯이, 우리는 숙소를 미리 예약하지 않는다. 마음에 들면 며칠이고 더 머물고, 기대와 달랐다면 다음 목적지로 향한다. 그렇게 하루를 늘리기도 줄이기도 하며, 무계획이 곧 계획이 되는 여정이다. 정해진 일정보다는 흘러가는 순간에 몸을 맡기는 일. 어디에 며칠을 머무를지는 그때그때 상황을 보고 결정할 일이었다.
원래는 촐폰아타에서 하루나 이틀만 머물 계획이었다. 하지만 도착하자마자 이상하게 몸이 무거웠다. 부모님과 함께한 일주일 동안 긴장을 늦추지 못한 탓인지, 아니면 친정엄마의 감기가 옮은 것인지 몸살 기운이 온몸을 휘감았다. 몸이 이 모양이니, 아무래도 더 쉬어야 할 것 같았다.
문제는 숙소였다. 급히 잡은 숙소는 마치 80년대 여관 같았다. 평소 같았으면 '정겹다'며 웃고 말았겠지만, 아픈 몸엔 그 정겨움이 허락되지 않았다. 우리는 호숫가 쪽으로 숙소를 옮기기로 했다. 남편이 인터넷으로 괜찮아 보이는 숙소를 하나 찾았다며, 직접 가서 보고 결정하자 했다. 평소 같았으면 위치며 거리며 꼼꼼히 검색했겠지만, 그날은 그럴 기운이 없었다. "조금만 걸으면 되겠지" 싶어 따라나섰다.
호숫가까지는 금방일 거라 생각했는데,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었다. "이쯤이면 호수가 보이겠지" 싶어 몇 번이나 고개를 들었지만, 눈앞에 펼쳐진 건 여전히 비포장 흙길뿐이었다. 무거운 몸을 질질 끌며 걷는 동안, 가던 길에 보이는 몇몇 호스텔에 들러 가격과 빈방 여부를 묻기도 했다.
숙소 후보가 두 곳으로 좁혀졌다. 하나는 창밖으로 설산이 보이고 수영장이 있는 곳, 다른 하나는 이식쿨 호수를 정면으로 내려다볼 수 있는 넓은 방과 발코니가 있는 곳이었다. 한쪽은 호수를 포기해야 했고, 다른 쪽은 수영장을 포기해야 했다. 장점만 있는 선택은 없었다. 그래서 더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가격은 둘 다 1박에 6만 원 대)
일단 결정을 미루고 여관 같은 숙소로 돌아왔다. 남편과 아이가 끓인 라면을 한 젓가락 떠보았지만, 입 안에서는 모래알을 씹는 듯 까끌거렸다. 결국 몇 젓가락 뜨지도 못한 채 타이레놀과 종합감기약을 한 번에 털어 넣었다.
몸도 무거운데 숙소 선택까지 쉽지 않았다. (사실 우리 부부는 원래 우유부단한 편이다.) 둘만 여행을 다녔다면 표가 1:1로 갈려 더 결정이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우리의 표는 홀수였고, 그 한 표는 아이에게 있었다.
"하루씩, 두 군데에서 다 자자!"
딸의 대답은 명확하고 간단했다. 우리는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결정을 못 내린다는 건 단점 같았지만, 뒤집어보니 오히려 여유였다. 하루씩 나눠 묵으면 된다―이 단순한 해법이 망설임을 여행의 재미로 바꿔주었다. 결국 우리는 두 숙소 모두를 경험하게 되었다.
보통의 여행자들은 촐폰아타에 하루쯤 머물며 이식쿨 호수에서 수영 한 번 하고는 곧장 다음 목적지로 향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곳에서 꼬박 나흘을 머물렀다. 머무는 내내 호수 수영을 했다. 하루는 현지인들이 찾는 온천에 들러 몸을 녹였고, 또 하루는 작고 화려한 유원지에서 아이와 알록달록한 미끄럼을 탔다. 유적지에도 다녀왔다. 특별한 건 없었지만, 특별하게 기억될 나날들이었다. 계획에 없던 날들을 하루씩 늘려가며, 그렇게 우리는 그곳에 있었다.
연재안내
란 패밀리의 기록을 기다려주시는 분들이 있다는 것. 그 마음에 힘을 얻어 기쁘게 연재 중입니다. 앞으로 매주 화·목·토 - 일주일에 세 번, 중앙아시아 가족 여행기를 전해드릴게요. 글을 읽는 분들께 작은 온기를 더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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