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하루만 있으려고 했는데…어, 어라?

5일을 머물렀지만 추천할 수 없는 도시

by 미나리즘


계획에 없던 쉼표가,
여행을 다시 이어주는 숨이 되었다.


특별할 건 없었지만 오래 남은 도시, 촐폰아타


첫째 날 - 멈춤의 필요

촐폰아타에서의 첫날, 몸살 기운이 온몸을 휘감았다. 타이레놀과 종합감기약을 한꺼번에 털어 넣고, 밤새 가라앉듯 잠에 빠졌다. 아침이 되자 숨은 조금 가벼워졌지만, 다음 여행지인 카라콜에서 계획한 트레킹을 감당하기엔 무리였다. 그래서 우린 발걸음을 늦추기로 했다. 그곳엔, 바다처럼 넓고 푸른 이식쿨이 있었으니까.


해발 1,600미터 고지대에 자리한 '이식쿨'은 겨울에도 얼지 않아 '뜨거운(이식) 호수(쿨)'라 불린다. 호수의 끝이 보이지 않아 사람들은 이곳을 바다라 부른다. 천산 산맥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낮에는 설산의 흰빛이, 밤에는 하늘의 별빛이 고스란히 호수 위에 내려앉는다. 바라보고 있자니 바다인지, 호수인지 정말 구분이 가지 않았다.


이식쿨 북쪽에 자리한 도시가 촐폰아타(Cholpon-Ata)다. 여름이면 곳곳에서 몰려든 피서객들로 북적이지만, 그 속에서 느긋한 숨결과 소소한 재미를 찾을 수 있다. 여행자에게 이보다 좋은 쉼터가 있을까. 달려온 여정을 잠시 내려놓고, 아픈 몸을 달래며, 호수의 잔잔한 리듬을 따라 느리고 깊은 호흡을 내쉬기에 더없이 알맞은 곳이었다.


둘째 날 - 국수 없는 국수집

김치말이 맛이 나는 국수(아쉬란-푸)를 먹으러 간 레스토랑에 국수가 없었다.


멈춤이 필요했기에 숙소를 옮겼다. 촐폰아타에서의 두 번째 숙소는 4층이었다. 무거운 배낭과 캐리어를 끌어올리느라 진이 다 빠졌지만, 창문을 열자 눈부신 만년설이 위로처럼 빛났다. '역시 힘들어도 옮기길 잘했구나' 싶었다. 창밖 풍경이 속삭이는 듯했다. "그래, 좀 쉬어가도 괜찮아."


환전도 하고 유심도 살 겸 시내로 나갔다. '김치말이 국수 맛이 난다'는 아쉬란-푸(Ashlan-Fu)를 먹기 위해 찾아간 레스토랑. 준비한 사진을 보여주며 주문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단호했다.

"NO. 오늘은 그 메뉴 없어."

그 국수 먹으러 일부러 찾아왔기에 허탈했다. 어쩔 수 없이 다른 메뉴를 주문했는데, 의외로 음식들이 하나같이 맛있었다. 기대했던 국수 대신 만난 낯선 맛이 오히려 더 깊은 인상을 남겼다. 여행은 그렇다. 기대와 어긋남 사이, 그 틈새로 뜻밖의 경험이 스며들곤 했다.


특별할 건 없었지만, 오래 기억될 촐폰아타


저녁은 숙소 수영장 옆 바에서 해결했다. 식사를 마치고 일어서려는데, 옆자리 현지인 무리가 말을 걸어왔다. 그중 한 명이 한국에서 일한 적이 있다며, 서툰 한국말로 인사를 건넸다. 낯선 나라에서 불쑥 들려온 익숙한 언어가 반가웠다. 잠시 대화를 나누던 그는 우리에게 단어 하나를 알려주었다.

"друг(두룩)". 친구라는 뜻이란다.

길 위에서 배운 짧은 단어 하나가 묘하게 오래 울렸다. 그날의 저녁 바람, 잔잔한 수영장 물결, 현지인들의 환대와 함께 스며든 '두룩(친구)'. 여행은 결국 이런 예상치 못한 순간들을 모아가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셋째 날 - 촐폰아타의 두 얼굴, 낮과 밤

몸은 절반쯤 회복되었고, 우리는 촐폰아타에서 세 번째 숙소로 짐을 옮겼다. 호스텔 뒷문을 나서 몇 걸음 옮기면 닿는 프라이빗 비치에서 남편과 아이는 호수로 풍덩 뛰어들어가 수영을 즐겼고, 나는 아직 몸을 다 추스르지 못한 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이의 웃음소리와 물살이 부딪히는 소리가 호숫가에 맑게 퍼져갔다.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풍경.


남편과 아이는 호수 수영을 즐겼고, 나는 컨디션 회복 중


그리고 해질녘, 촐폰아타의 암각화 박물관을 찾았다. 도시 중심부에서 택시를 타고 10여분만 달리면 닿는 야외 박물관이다. 광활한 벌판에 수많은 바위들이 흩어져 있고, 그 위에는 수천 년 전 사람들이 새긴 그림들―사냥 장면, 동물, 태양을 숭배하는 상징―이 남아 있다.

솔직히 말해, 큰 감흥은 없었다. 일반인의 눈에는 그저 오래된 돌덩이처럼 보였을 뿐이다. 다만 돌아서는 길에 우연히 스친 한국 단체 관광 가이드의 외침이 귀에 들어왔다.

“이제 촐폰아타의 하이라이트, 온천으로 갑니다!”

온천이라니? 촐폰아타에 온천이 있다고? 뜻밖의 정보였다.


다른 사람에게는 차마 추천하지 못하지만, 우리에겐 잊지 못할 추억이 된 유원지


밤이 되자 도시는 전혀 다른 얼굴을 드러냈다. 낮에는 황량하던 공터가 밤이 되자 화려한 불빛과 음악으로 가득한 유원지로 변신했다. 아이는 튜브 미끄럼틀을 타며, 신나게 웃었다. 바로 옆에선 차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렸지만, 그 엉성한 공존이 오히려 유원지의 생동감을 더 짙게 했다. 낯선 도시의 밤 풍경은 어릴 적 야시장의 기억과 포개지며 묘한 그리움을 데려왔다.


저도 아이와 함께 미끄럼틀을 탔습니다. 신났어요!


넷째 날 - 풍덩, 호수 속으로

하루만 머물 생각이었던 촐폰아타에서 어느새 나흘을 보냈다. 오늘은 결국 나도 호수로 몸을 던졌다. 차갑게 파고드는 물살에 순간 움츠러들었지만, 곧 호수 속으로 온전히 스며들었다. 바라보기만 할 때는 느낄 수 없었던 이식쿨의 매력이 비로소 온몸에 번져왔다.


어제 우연히 들은 정보를 따라 저녁 무렵 온천을 찾았다. 붉은 노을이 보랏빛으로 물드는 풍경을 바라보며 뜨끈한 온천수에 몸을 담그니 며칠간 나를 괴롭혔던 몸살 기운이 이제 완전히 사라지는 듯 했다. 발끝을 간질이는 닥터피쉬 체험에 아이도, 나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낯선 도시의 온천에서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고 미소로 감싸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촐폰아타에서 머문 나흘, 특별한 건 없었지만 따뜻한 기억으로 서로를 채운 시간이었다.


이식쿨 호수가 보이는 호스텔에서 2박을 보냈고, 주인 가족들과도 친해졌다.


그리고 다섯째 날

드디어 카라콜로 넘어간다.


촐폰아타에서의 나흘은 쉼표 같은 시간이었고,
그 쉼표 덕분에
우리의 여행이 한층 더 단단해졌다.


회고 ; 쉼표가 남긴 것

돌아보면, 촐폰아타에서 굳이 4박 5일을 머물 필요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남부 이식쿨의 고요함에 비해 그곳은 떠들석하고 혼잡했으니까.


하지만 그때의 우리에게는 멈춤이 필요했다. 아픈 몸을 쉬게 하고, 앞서 꽉꽉 채워 달려온 일주일의 여행에 느슨한 호흡을 불어넣는 일. 그 나흘 동안 비로소 여행의 속도를 늦추고, 몸이 회복되는 시간을 기다릴 수 있었다. 아이에게 '야시장'이라는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주었고, 호수에 풍덩 빠지는 순간을 온전히 즐길 시간을 주었으며, 길 위에서 우연히 배운 '두룩' 같은 작은 단어 하나마저 마음에 담아둘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함께 걸어가는 이 기록이, 누군가의 다음 발걸음에 작은 용기가 되길 바라며.


연재안내
란 패밀리의 기록을 기다려주시는 분들이 있다는 것. 그 마음에 힘을 얻어 기쁘게 연재 중입니다. 앞으로 매주 화·목·토 - 일주일에 세 번, 중앙아시아 가족 여행기를 전해드릴게요. 글을 읽는 분들께 작은 온기를 더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중앙아시아 여행이나 아이와 함께하는 배낭여행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으시면 언제든 댓글 남겨주세요. 란 패밀리를 향한 응원도 큰 힘이 됩니다.








keyword
화, 목,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