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부디, 살아가길
여행자들이 키르기스스탄의 카라콜을 찾는 가장 큰 이유는 단연 알틴-아라샨(Алтын-Арашан / Altyn Arashan) 때문이다. 본래는 계곡 이름이지만, 게스트하우스와 유르트 캠프가 모여 있어 여행자들 사이에서 하나의 마을처럼 불린다. 해발 2,500미터 고지대에 숨겨져 있는 알틴 아라샨에 닿기 위해선 빽빽한 나무 숲과 푸른 초원, 이름 모를 들꽃이 겹겹이 이어진 길을 한참이나 올라야 한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서 드러나는 풍경은…, 마치 오래 닫혀 있던 보물상자가 열리듯 신비롭다.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편을 기대하세요!)
알틴 아라샨뿐만 아니라 푸른 초원과 완만한 능선이 끝없이 이어지는 지르갈란(Жыргалан/Jyrgalan) 역시 카라콜에서 출발할 수 있는 대표적인 트레킹 코스다. 그래서 카라콜은 단순한 도시가 아니라, 길 위의 수많은 선택지가 시작되는 여행자들의 '베이스캠프' 같은 곳이다.
여행을 많이 다닌 동생이 "키르기스스탄에서 가장 좋았던 숙소"라며 추천해준 곳이 있다. 에르킨하우스. 믿을 만한 동생의 말이었기에 이번엔 다른 숙소를 찾아볼 생각도 않고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붉은 철문을 열자 커다란 대저택 같은 집 안에 열 개 남짓한 방이 여행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에르킨'이라는 이름은 세 딸의 아버지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집 안에는 이미 따뜻한 '에르킨' 가족의 기운이 스며 있는 듯했다.
숙소 자체도 훌륭했지만, 진짜 기억에 남는 건 에르킨 하우스의 따뜻한 가족들이다. 큰딸과 둘째 딸은 능숙한 영어로 다가와 여행자의 낯섦을 금세 지워주었고, 아빠 '에르킨'은 볼 때 마다 친근한 웃음을 건네주었다. 특히, 그의 막내딸과 나이가 같은 우리 아이에게 다정하게 다가와 주어, 우리는 어느새 손님이 아니라 벗처럼 어울리게 되었다.
그리고 대화 속 자연스레 우리 부부가 쓴 책 《꿈꾸는 여행자의 그곳, 남미》를 꺼내 보여줄 기회가 있었다. 사실 그 책은 이제 막 줄글을 읽기 시작한 딸과 여행 중 함께 읽으려고 챙겨온 것이었는데, 그곳에서 낯선 이들과 마음을 나누는 다리가 되어준 것이다.
아침도 점심도 거른 채 달려온 터라, 점심 겸 저녁으로 현지인(에르킨 하우스의 딸)이 추천한 맛집으로 향했다. 음식은 하나같이 훌륭했지만, 샤슬릭의 크기를 미처 짐작하지 못한 채 세 개나 시킨 게 무리였다. 결국 꼬치 두 개를 거의 남기는 바람에, 남은 고기를 포장해 숙소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때였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던 골목 저편에서 작은 그림자 하나가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스스로를 지탱하기조차 힘겨워 보이는 그 작은 존재 앞에서, 우리의 발걸음은 저절로 멈추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부터,
여행의 풍경과 맛에 대한 기록에서, 잊지 못할 생명을 마주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태어난 지 한 달 남짓 되었을까. 눈곱이 잔뜩 껴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힘없는 아기 고양이가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아이는 조심스레 곁에 앉아 포장해 온 고기를 조금씩 떼어줬다. 처음엔 먹는 법조차 몰라 머뭇대던 녀석은 곧 허겁지겁 입을 대기 시작했다. 혹여 목이 메일까 싶어 고기를 잘게 잘라주던 아이의 손이 금세 기름 범벅이 되었지만, 아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낯선 땅에서, 집도 없는 우리가 데려갈 수는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렇다고 매정하게 등을 돌릴 수도 없었다. 결국 10분이면 닿을 거리를 30분에 걸쳐, 고양이를 데리고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왔다. 놀랍게도 딸을 놓칠세라 짧은 다리로 열심히도 따라온 새끼 고양이였다.
사정을 들은 에르킨 하우스의 둘째 딸은 “마당에 두면 괜찮다”며 우유 담을 작은 종지를 내어주었다. 그제야 아이 얼굴에도 웃음이 번졌다. 밤이 깊도록 고양이 곁을 떠나지 않으며, 마당 한켠에 지푸라기와 흙을 모아 보금자리를 만들어주던 아이는 작은 생명이 따뜻히 잠들기를 바랐다.
다음 날 아침, 아이는 눈을 뜨자마자 마당으로 달려나갔다. 그러나 어디에도 고양이는 보이지 않았다. 어젯밤 함께했던 시간이 꿈처럼 사라진 듯, 텅 빈 마당만이 아이를 맞이했다. 아이는 한참을 두리번거리다 결국 고개를 떨군 채 안으로 들어왔다. 얼굴에는 실망과 아쉬움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에르킨 하우스의 아침 식사는 커다란 테이블에 둘러앉아 함께 나누는 자리였다. 빵과 계란, 과일, 차와 잼, 꿀 등이 정갈하게 놓였고, 프랑스·이탈리아·이스라엘 등 매일 다른 나라의 여행자들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아이는 조용히 앉아 있었지만, 그 풍경 속에서 낯선 문화와 언어를 고스란히 흡수하며 또 다른 여행의 장면을 마음속에 담는 듯 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마당으로 나오자, 다행히 고양이가 다시 돌아와 있었다. 아이의 얼굴에도 다시 미소가 피어났다.
여행지에서 마주한 작은 생명 하나에 아이가 온 마음을 내어주는 순간을 보았다. 그때 알았다. 이 여행은 단순한 풍경과 문화 경험의 기록이 아니었다. 길 위에서 우리가 배우는 건 누군가에게 마음을 기울이는 법이라는 걸.
카라콜의 아기 고양이, 그 작은 만남이 여행을 기록에서 시로, 풍경에서 마음의 울림으로 바꾸어 놓았다.
연재 안내
란 패밀리의 기록을 기다려주시는 분이 있다는 것. 그 마음에 힘을 얻어 기쁘게 연재를 합니다. 매주 화·목·토 - 일주일에 세 번, 중앙아시아 가족 여행기를 전해드릴 거예요. 사진은 최대한 현장 느낌이 잘 나는 것으로 골라봅니다.
글을 읽는 분들께 작은 온기를 더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중앙아시아 여행이나 아이와 함께하는 배낭여행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으시면 언제든 댓글 남겨주세요. 연재에 큰 힘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