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럴 줄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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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에 닿기 5분 전부터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지칠 대로 지친 다리는 한계에 이르렀다. 한 발 떼는 것조차 힘겨웠고, 진흙으로 변한 흙길은 얼마 남지 않은 힘마저 앗아갔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시간이었다. 마침내, 여덟 시간만에 우리는 예약해둔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에코(Eco) 게스트하우스.’ 전날 카라콜에서 묵었던 게스트하우스 주인이 귀띔해 준 곳이다.
사실 우리나라 여행자들 사이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엘자 게스트하우스'다. 엘자를 검색하면 수많은 후기가 쏟아져 나온다. 한국인 여행자라면 누구나 거쳐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 하지만 이상하게도, 모두가 한목소리로 추천하는 곳으로는 좀처럼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런 성향은 남편과도 묘하게 닮았다.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들을 때도 타이틀곡보다는 덜 알려진 서브곡을 즐겨 들었다. 서브곡에 담긴 미묘한 결, 거기서만 느낄 수 있는 의외성이 좋았다. 여행 중에도 그 습성은 이어졌다. 우리는 결국 현지인이 추천해 준 '에코 게스트하우스'를 택했고, 그 선택은 후회 없는 만족으로 이어졌다. 모두가 가는 길이 아닌, 조금 비켜 선 길 위에서야 비로소 우리만의 이야기가 시작될 것 같은 기분이랄까.
'엘자'와 비교할 순 없지만, 아늑한 숙소와 1인 400솜(한화 약 6천 원)의 저녁 식사는 깊은 산속이라는 사실을 잊을 만큼 따뜻하고 푸짐했다. 수프와 볶음밥, 그리고 향신료가 가볍게 스민 고기가 테이블 위에 놓였을 때, 남편과 내가 오래 전부터 공유해 온 여행 철학―검증된 여행지는 안심과 편안함을 주지만, 모험이 깃든 선택에선 우리만의 이야기가 피어난다.―이 다시금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밤은 이내 깊어졌다. 난방은 없었지만, 이불은 두터웠다. 아이의 숨결이 가까이 느껴지고, 창밖엔 빗방울 소리가 이어졌다. 그날, 서늘했던 알틴아라샨의 밤은 따뜻함으로 기억된다.
날이 밝은 알틴아라샨은 또 다른 세상이었다. 밤새 비에 씻긴 하늘은 푸르렀고, 멀리 설산이 햇살에 반짝였다. 사람들은 말을 타고 알라쿨 패스로 향했다. 하지만 우리는 욕심을 버렸다. 무리해서 더 높은 곳으로 오르기 보다는 우리만의 속도로 알틴아라샨을 천천히 둘러본 뒤, 내려가기로 결정했다.
하산의 방법은 푸르공이었다. 푸르공은 현지에서 흔히 쓰이는 낡은 4WD 승합차다. 가격은 한 대 기준 8,000~10,000솜, 대략 12~16만원 선이다. (차량 한 대당 6~8명이 탑승할 수 있다.) 문제는 ‘한 대 가격’이라는 점. 동행자를 구하지 못하면 고스란히 우리 세 명이 부담해야 했다.
오전 11시, 하산하기엔 애매한 시간대라 함께 내려갈 사람이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는 조금씩 걸어 내려가며 빈 푸르공을 잡아 타는 전략을 세웠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차량엔 세 자리가 나지 않았다. 고개를 저으며 지나가는 운전자의 눈빛에서, 이 길의 냉정한 규칙을 배웠다. ‘빈자리가 없다면, 그저 걷는 수밖에 없다.’ 그러다 네 번째 푸르공에서 운 좋게 자리가 났다. 마침내 우리는 낡은 푸르공 안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하지만 푸르공을 탔다고 고생이 끝나는 게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또 다른 형태의 고생이 시작됐다.
푸르공은 골짜기의 심장을 그대로 옮겨 싣은 듯 쿵쾅이며 달렸다. 바퀴는 자갈과 진흙 위에서 미끄러지듯 튀어 오르고, 차체는 거대한 파도에 휩쓸린 듯 좌우로 흔들렸다. 창밖으로 보이는 절벽은 아찔하게 내려앉아 있었고, 그 옆으로는 거세게 흘러내리는 계곡물이 부서지며 흰 포말을 일으켰다.
우리는 그 흔들림 속에 속수무책으로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덜컹임은 끝날 줄 몰랐다. 한순간은 몸이 공중에 뜨는 듯했고, 또 한순간은 땅속으로 꺼져버리는 듯했다. 길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험로를 따라 이어진 하산은, 끝없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마침내 푸르공은 거친 호흡을 몰아쉬듯 멈춰 섰다. 눈앞에 악수 온천의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우리는 온천 입구를 지나 안으로 발을 들였다.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어 있던 어깨와 다리를 이끌고 뜨거운 물 속에 몸을 담그는 순간, 모든 감각이 극적으로 전환되었다.
발끝에서부터 스며든 열기가 빠르게 온몸을 채우며, 1박 2일의 고단함을 하나씩 풀어냈다. 온몸을 뒤덮은 흙먼지와 땀내나는 발, 15km의 걸음들과 푸르공의 덜컹거림까지. 모든 불편은 뜨거운 물결 속에서 눈 녹듯 사라지고, 남은 건 말로 다할 수 없는 극한의 보상뿐이었다. 힘들었던 만큼 극적인 행복감을 느끼며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바로 이거였어. 이 온천에 오려고, 우리는 알틴아라샨을 올라갔다 내려온 거지!”
여행의 진짜 이유란,
결국 이런 순간을 만나기 위함이 아닐까.
연재 안내
란 패밀리의 기록을 기다려주시는 분이 있다는 것. 그 마음에 힘을 얻어 기쁘게 연재를 합니다. 매주 화·목·토 - 일주일에 세 번, 중앙아시아 가족 여행기를 전해드릴 거예요. 사진은 최대한 현장 느낌이 잘 나는 것으로 골라봅니다.
글을 읽는 분들께 작은 온기를 더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중앙아시아 여행이나 아이와 함께하는 배낭여행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으시면 언제든 댓글 남겨주세요. 연재에 큰 힘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