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기스스탄, 어느 하루
길 위에서 또 어떤 내일이 펼쳐질지,
아무도 알 수 없다.
키르기스스탄 동부, 카라콜에서 불과 1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악수(Ak-Suu). 키르기스어로 ‘흰 물’을 뜻한다. 계곡을 따라 흐르는 강물이 흰 포말을 일으키며 흘러내리는 모습에서 비롯되었다. 이 계곡에는 오래 전부터 온천이 솟아났고, 소련 시절엔 ‘산토리움(요양소)’이라 불리던 치료와 휴식의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라돈 성분이 섞인 뜨거운 물은 관절과 신경통에 좋다 전해졌고, 지역 주민들에게는 세월을 거슬러 지금까지도 이어져 온 치유의 장소다.
그러한 악수 온천은 이제 현지인과 여행자들의 피로를 달래는 쉼터가 되었다. 매표소에 닿기도 전, 바깥에서부터 커다란 노천탕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하나의 큰 풀이 세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가장 뜨거운 곳은 50도가 넘고, 아래로 내려올수록 40도 안팎의 뜨끈한, 딱 좋은 온도의 온탕이 이어졌다. (이밖에도 온도가 더 낮은 몇 개의 탕이 더 있다.)
우리도 그 따끈함에 몸을 맡겼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물 속에 들어서는 순간, 지난 이틀의 무게가 녹아내렸다. 알틴아라샨에서 여덟 시간을 걸어내던 발걸음, 비를 맞으며 미끄러지던 진흙길,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던 순간들이 마치 오래된 기억처럼 멀어져갔다.
무엇보다 특별한 건 온천의 자리였다. 탕 옆으로 좁은 돌계단이 이어져 있고, 그 끝에는 우렁차고 차가운 계곡이 있었다. 용암 같은 온천과 얼음 같은 강이 불과 몇 걸음 차이로 공존하는 풍경.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갔다가 차가운 강물에 발을 담그는 순간 숨이 턱 막히고, 심장은 철렁 내려앉는다. 뼛속까지 느껴지는 시림에 순간적으로 몸이 움츠러들지만, 다시 뜨거운 물로 돌아왔을 때 찾아오는 그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마치 몸 전체가 새롭게 깨어나는 듯했다.
아이는 잠시 망설이다 발끝을 살짝 담그더니, 곧 소리를 지르며 뛰어올랐다. 하지만 금세 다시 돌아와 이번에는 무릎까지, 그리고 결국 온몸을 던져 넣었다. 계곡 물소리와 뒤섞인 아이의 웃음이 골짜기에 울려 퍼졌다. 그때부터, 이 낯선 온천은 우리 가족에게 세상에서 가장 신나는 놀이터가 되었다.
사실 오늘 밤 어디서 잘지 정하지 않은 상태였다. 카라콜에서 묵었던 호스텔에 큰 배낭은 맡겨두고, 며칠간 필요한 짐만 작은 가방에 챙겨 나선 참이었다. 언제 돌아갈지, 어디서 머물지 특별한 계획이 없었다. 우린 이런 여정을 ‘여행 속 여행’이라 부른다.
온천의 수증기 속에서 우리는 이야기를 나눴다.
“오늘 밤은 어디서 잘까? 카라콜로 돌아갈까, 아니면 곧장 지르갈란으로 향할까?”
정해둔 답이 없었기에 가능한 대화였다. 우리 여행의 8할은 비어 있다. 언제든, 무엇으로든 채울 공간이 넉넉하다. 그래서 우리 여행은 늘 자유롭고, 내일은 언제나 미지다.
결국 우리는 다시 도시로 돌아가는 대신, 온천을 마치고 곧장 지르갈란으로 가기로 했다. 그 길 위에서 또 어떤 내일이 펼쳐질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길 위에서 또 어떤 내일이 펼쳐질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연재 안내
란 패밀리의 기록을 기다려주시는 분이 있다는 것. 그 마음에 힘을 얻어 기쁘게 연재를 합니다. 매주 화·목·토 - 일주일에 세 번, 중앙아시아 가족 여행기를 전해드릴 거예요. 사진은 최대한 현장 느낌이 잘 나는 것으로 골라봅니다.
글을 읽는 분들께 작은 온기를 더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중앙아시아 여행이나 아이와 함께하는 배낭여행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으시면 언제든 댓글 남겨주세요. 연재에 큰 힘이 됩니다.